보건복지부가 올해 5월 펴낸 ‘2018년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16년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 중 취업자 비중은 45.6%다. 비중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서비스·판매 종사자(10.5%)와 단순노무 종사자(6.3%)가 많았다. 경찰청 내부자료를 보면 같은해 자살자 1만3천20명 중 514명의 자살동기가 ‘직장 또는 업무상 문제’였다. 그런데 자살이 산재로 인정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자살·자해행위를 정신질환에 포함한다. 우울병·불안장애·적응장애·외상후 스트레스·수면장애와 같은 범주다. 산재를 인정받으려면 정신질환 이력을 대야 한다. 정신질병을 산재로 인정한 건수는 2016년 169건 중 70건에 불과하다. 매년 500명을 훌쩍 넘는 노동자들이 직장내 문제로 자살을 택하지만 대다수는 산재보상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진경락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신아 대표)가 실무에서 경험한 자살산재 문제를 정리해 보내왔다. 그는 “현실은 이미 임계 수위를 넘은 지 오래여서, 자살산재 법리를 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며 “맡았던 사건에서 수많은 쟁점에 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름 명쾌하게 제시해 왔다고 자부하는 논리들을 체계화해 논문으로 발표한 것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5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진경락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신아 대표)

자살은 정신질환 기왕력과 개인적 특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업무로 받은 스트레스나 과로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자살산재 인정이 까다로운 건 엄격한 업무와 자살 사이의 인과관계를 요구하는 데 있는데, 그 이면에는 그 죽음이 업무로 인한 심리 부하에 기인한다는 걸 입증해 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유족의 입증책임, 불가능을 하라는 것

법원이 존부 또는 진위 불명(non liquet) 사실에 관해서는 당사자 어느 한쪽에 불리하게 가정해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불이익을 입증책임이라 한다. 아무리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라 해도 입증책임을 지는 쪽이 증거를 제시하면서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 주지 않으면 그런 사실은 없었던 것이 된다.

자살 동기나 경위를 알고 있는 유일한 당사자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는 그 어떤 사실관계도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유가족은 주위 사람들 시선을 우려해 드러내 놓고 증거를 수집하길 꺼려 한다. 심지어 사용자가 증인 출석이나 감정 방해, 증인 불고지, 병상일지 변조나 훼손 같은 입증 방해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업무와 관련된 증거자료는 모두 사용자가 가지고 있다. 회사측 협조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유가족은 무기력할 뿐이다. 더욱이 의학적으로 입증하라는 게 정부 입장 아닌가. ‘권리는 주장하는 자가 입증책임을 진다’는 주장이 적어도 자살 사건에서만큼은 비현실적인 담론일 뿐이다.

입증책임 완화한 외국

독일에서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피재자 재해가 정부에서 만든 직업병리스트에 해당하고, 유해요인 위험성이 원래 업무에 기인한다는 사실과 그 유해요인이 질병을 야기했을 ‘개연성’만 증명하면 된다. 영국은 업무수행 중에 발생한 재해를 산재로 추정한다. 자살자 유가족이 부담하는 입증책임은 완화되는 셈이다. 캐나다(온타리오주)도 비슷하다. 자살이 업무에서 비롯됐다면 반대 증거가 없는 한 업무수행 중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보다 유가족의 증명을 조금 더 엄격하게 요구하는 나라도 있다. 스웨덴은 입증책임을 원칙적으로 피재자에게 지우고 있다. 독일과 같은 직업병 목록이 없는 상태에서 업무상 유해요인과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고도의 개연성(high probable)’으로 증명되는 경우에만 업무상재해로 인정된다. 한때 그 증명책임을 산재보험기관에 지웠다가 피재자쪽으로 환원된 케이스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3년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사용자가 입증하도록 우리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입증책임, 어떻게 할 것인가

헌법재판소는 업무상질병 입증책임을 근로자나 그 유족이 지도록 한 산재보험법 37조1항2호가 위헌이 아니란 입장이다(헌재 2015. 6. 25. 선고 2014헌바269 결정). 이때 입증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입법개선이 필요하다는 보충의견도 있었다. 질병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현재까지의 과학이나 의학으로는 밝혀낼 수 없는 새로운 질병이 나타나는 현실에서 전문지식이나 관련 정보가 부족한 피재자나 유족들에게 입증책임을 전적으로 부담시키는 건 가혹하다는 거다.

전문가들이 산업구조나 작업환경 변화에 따라 새롭게 나타나는 질병을 과학적으로 조사·체계화해서 산재보험법 시행령 별표 3을 정기적으로 보완하는 걸 의무화하자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에 의한 자살을 업무상질병으로 보지 않는 현재 시스템에서 이 방법은 무용지물이다.

산재보상이 근로계약상 사용자 책임의 범위를 넘어 점차 사회보장화 경향을 띈다는 건 입증책임을 국가가 맡을 논리적 명분이 갖춰진 거다. 입증책임의 소재는 누구 영역에서 입증이 가능한지를 살피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ILO 권고가 다분히 현실적인 방안이다. 실질적인 무기평등의 원칙을 구현하려면 ‘일응 추정의 법리’를 도입하고, 문서제출명령이나 증거보전명령을 확충하는 입법 보완도 필요하다. 자살산재는 인과관계를 직접증거로 입증하기보다 간접사실 입증에 의존하는 경우가 다수여서다.

또 다른 대안, 심리부검

2009년 11월 세무공무원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다발성 손상을 입고 사망한 사건에서 서울고법은 1천건 이상의 자살 사례연구 경험이 있는 연세대 원주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의뢰해 사건 조사 서류, 국세청 내부자료, 개인적 채무관계를 분석하고 유가족들과 직장 동료·선후배들을 대상으로 한 개별 면담을 실시하도록 한 결과 자살 원인이 과다한 업무 부담, 불합리한 조직개편, 승진 좌절로 인한 실망감이었다는 의견을 얻어 공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법원이 심리부검을 실시한 결과를 반영해 판결한 최초 사례(2013년 12월)다.

북미 법정에선 1980년대부터 산재 사건에 심리부검(Psychological Autopsy)을 활용했다. 원래 심리부검은 자살자 주위 사람들을 대상으로 후향적으로 조사하는 건데 의학적 규명과 규범적 판단이 혼재해 있는 업무상자살이 산재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