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은 22일부터 23일까지 충북 제천 청풍리조트에서 사상 첫 정책대의원대회를 열고 향후 5년 투쟁계획을 논의했다. 제정남 기자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원동력인 우리들 노동자는 오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을 선언한다."

1995년 11월11일 나온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의 첫 글귀다. 87년 민주화 운동과 함께 불붙은 노동자 대투쟁은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을 거쳐 95년 민주노총 탄생으로 이어졌다. 조합원 40여만명으로 출범한 민주노총은 창립 20년이 지나는 사이 몸집을 두 배로 키웠다. 한국 사회 진보운동의 대표세력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민주노총 "이대로는 안 돼" 사상 첫 정책대의원대회

하지만 민주노총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안팎의 비판에 수년째 직면해 있다. 2014년 위원장·수석부위원장·사무총장을 조합원 직선으로 선출한 것도 "민주노총에 대한 조합원들의 애정·충성도를 끌어올리고 비민주적 조직운영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한상균 집행부는 주요 사업계획을 정기대의원대회에 제출했다. 이영주 사무총장은 지난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첫해 총파업으로 조직을 혁신하고 두 번째 해에 정책대의원대회를 통해 조직 발전·혁신의 장기적 전망을 세운 뒤 삼 년차에 최저임금 1만원을 내건 총파업을 벌여 세상을 바꾸는 주체적 힘을 만들 것"이라며 "한 위원장 구속과 상관없이 노동운동의 발전 전망을 수립하겠다는 조합원들과의 약속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난 22일부터 23일까지 1박2일간 충북 제천 청풍리조트에서 열린 민주노총 2016년 정책대의원대회는 한상균 집행부의 이 같은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창립 후 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정책대대를 위해 민주노총은 올해 5월부터 7월까지 전국 단위조직별로 조합원 토론을 전개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8월 두 차례 회의를 열고 수렴된 의견을 중심으로 정책대대 안건의 윤곽을 그렸다. 이날 정책대대는 조합원들의 의사에 기반을 둔 안건을 심의·의결하는 자리로 준비됐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현장 토론이 원활히 진행되지는 못했다"면서도 "조합원 토론을 통해 민주노총 전략을 수립한다는 풍토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고 준비 과정을 자평했다.

내년 최저임금 1만원 총파업, 5년 조직강화 전략 수립

민주노총은 조직혁신전략과 전략조직사업·기금조성계획이라는 두 기둥을 통해 조직의 장기적 발전·강화를 도모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정책대대에 안건으로 제출했다.

조직혁신전략의 세부 내용인 △전략투쟁과 의제 △조직 강화 △조직 확대 등 세 가지 안건은 비교적 무난하게 동의가 이뤄졌다. 민주노총은 앞으로 체제 변혁과 대안체제 수립, 자주통일 기반 구축 등 5대 전략투쟁을 중심으로 총파업과 전략투쟁에 나선다. 올해 하반기 2차 총파업과 민중총궐기를 열고 내년에는 최저임금 1만원 쟁취를 전면에 내걸고 총파업을 벌인다. 2022년까지 5년간 미조직 조직사업과 연대투쟁, 민중연대 활동을 강화한다.

일부 사업장이 비정규직의 조합원 가입을 제한하는 것과 관련해 산별노조와 단위조직의 규약·규정을 개정해 나갈 방침이다. 산별운동과 지역본부를 강화하는 2022년까지의 로드맵은 내년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재차 논의한다.

"정치 다원화 인정, 지금 이대로"
"정당 건설해 공동투쟁으로 이견 좁히자"


조직혁신전략 세부 내용 중 마지막 안건인 정치전략 논의는 예상대로 뜨거운 감자였다. 22일을 기준으로 민주노총 대의원은 963명이다. 정책대대가 시작할 즈음 512명이던 참가 대의원은 정치전략이 논의될 즈음 581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참관인 규모만 200여명에 달했다. 600석이 준비된 회의장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현재 민주노총에는 정치전략과 관련해 세 가지 흐름이 존재한다. 지난해 민중총궐기 성과를 발전시켜 노동자·농민·빈민이 함께하는 진보정당을 건설하자, 다양한 정치성향과 현실을 인정하고 연대활동을 이어 가자, 공동 대선투쟁을 통해 신뢰를 회복한 뒤 정치세력화를 모색해 나가자 등이다.

중앙집행위는 세 가지 흐름을 적절히 뒤섞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 내년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방침을 결정하자"(1안)는 의견과 "민주노총 주도의 진보대통합당을 건설해 공동투쟁을 벌이자"(2안)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정책대대 논의를 통해 다양한 흐름을 수렴하려던 민주노총 집행부의 복수안 상정은 결과적으로 독이 됐다. 대의원들의 의견은 진보대통합정당을 만들자는 의견과 두 가지 안건을 모두 폐기하자는 의견으로 뚜렷이 양분됐다. 후자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각자도생하는 현 지형을 그대로 두거나 혹은 오랜 시간을 갖고 천천히 고민해 보자는 견해다.

통합정당 건설에 찬성하는 한 대의원은 "생각에 차이가 있다고 한 단위사업장에 노조를 두세 개 만들지는 않는다"며 "민주노총이 앞장서 사분오열된 진보정당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하나가 돼 공동투쟁을 벌이라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주장했다.

반대쪽 대의원은 "복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민주노총이 하나의 행동통일을 강요하는 것은 정치적 다원성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진보정당 단일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 더 큰 분열이 이뤄질 수 있다"고 소리 높였다. 일부 대의원은 "통합을 말하는 이들이 민주노총이라는 백그라운드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 민주노총을 앞세워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중앙집행위 호소에도 정치전략 수립 무위로

대의원들의 이 같은 도돌이표 주장이 반복되자 중앙집행위는 22일 자정께 50여분간 별도 회의를 열고 기존 두 가지 안건을 철회한 다음 새로운 수정안을 내놓았다. 같은날 오후 7시30분께부터 자정까지 50여명의 대의원들이 마이크 앞을 거쳐 간 뒤였다.

중집 위원들은 "정치방침에 대해 전 조직적 토론을 거쳐 내년 정기대대에서 정치세력화 방안을 의결하자"는 취지의 수정안을 제시하고 가결을 호소했다. 민주노총 주도의 정당건설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은 해당 수정안에도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이들 중 일부는 23일 새벽 1시가 넘어가면서 정책대대 정족수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회의 자체를 유예시켜 정치전략 결정을 무산시키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새벽 2시께 재차 정회한 뒤 중앙집행위는 정치전략을 추후에 논의하기로 하고 앞서 논의한 조직혁신전략 통과를 대의원들에게 요청했다. 빈손으로 정책대대가 막을 내리는 것을 막으려는 고육책이었다. 만장일치 통과 후 확인한 대의원수는 338명. 의사정족수 482명에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정책대대는 정치세력화 방법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채 마무리됐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집행부 의사는 수용되지 않았다. 장시간 정치전략 논의로 인해 전략조직사업방향과 기금조성계획은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한상균 위원장 공백 확인
"사실상 지도부 불신임 수준 결정"


회의 중 백석근 건설산업연맹 위원장은 "서로에 대한 이중 삼중의 불신만 확인한 뒤 판을 깨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며 "한상균 위원장을 감옥에 두고서 진영논리만 앞세울 것이냐"고 말했다. 한 위원장 공백의 크기가 정책대대에서 확인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발전전략과 정치전략에 위원장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되지 않은 데다, 위원장이 대의원들에게 집행부 의견을 호소할 수 없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정책대대가 끝났다"며 "사실상 지도부 불신임 수준의 결과가 나오면서 민주노총 지도력에 더 큰 구멍이 불가피하게 됐다"고 내다봤다.

정치방침에 대한 내부 의견이 수면 위로 떠올라 공론화됐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는 평가도 있다. 한 대의원은 "향후 5년 투쟁의 밑그림을 그리는 조직혁신전략이 수립됐다는 점은 성과"라며 "정치방침에 대한 내부 이견이 선명하게 확인되면서 앞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안을 고민할 때 참고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한편 한상균 위원장은 정책대대 개최에 앞서 대의원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에서 "노동자-자본, 노동자-정부 간 전쟁의 승패는 우리 편을 누가 많이 만드느냐에 달려있다"며 "소수의견까지도 소중하게 모아내 충분히 점검하면서 현장 의견을 모아 함께할 대의명분을 찾는 과정을 논의해 달라"고 호소했다.

대의원들은 23일 오전 선택참여 토론을 열고 세월호 투쟁·공적연금 강화 투쟁·보육정책 개혁·재벌개혁·퇴직 조합원 재조직화 사업을 민주노총 주요 사업으로 준비하자고 제안한 뒤 정책대대를 마무리했다. 민주노총의 차기 정책대대 개최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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