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시리자는 2004년 군소정당으로 등장해 10년 만에 집권정당으로 도약했다. 우리도 가 보지 않은 길로 나서야 한다. 한국에서도 시리자는 다가오는 희망의 근거로 이야기될 것이다."

올해 1월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 정당 시리자(Syriza)가 승리하자 민주노총이 발표한 성명이다. 민주노총 성명처럼 10여개가 넘는 정파가 연합해 만든 시리자의 총선 승리를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대 총선을 1년 앞두고 실시된 4·29 재보궐선거가 새누리당 압승으로 끝나자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형국이다. 야권연대 없이 막강한 새누리당에 겨룰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이 재확인됐고, 진보진영의 풀리지 않은 앙금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진보정치세력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정의당·노동당·노동정치연대·국민모임
재보선 후 통합논의 본격화


4·29 재보선에서 진보정치세력은 "야권연대는 없다"고 선을 그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을 압박하지도, 대안세력 가능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키지도 못했다. 최근 정의당·노동당·국민모임·노동정치연대 4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진보결집(진보재편) 논의는 내년 4월13일 실시되는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했다. 이병렬 노동정치연대 집행위원은 "진보가 무기력한 상태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대중들이 진보정당보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내년 총선에서는 진보정당이 대안정당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단체는 4·29 재보선을 앞둔 올해 3월부터 '4자 정무협의회'를 꾸려 만나고 있다. 선거 전에는 후보연합·선거대응을 논의했고 최근에는 진보결집을 목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 하지만 대내외적 사정이 복잡해 아직 본격적인 통합 논의는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2011년·2014년 논의와 어떻게 다르나

4자 논의가 성과를 맺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는 2011년과 2014년의 진보통합 논의 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통합 대상과 방식·논의 전개 양상도 과거와 유사하다.

2011년 민주노동당·진보신당·사회당이 첫발을 뗀 진보대통합 논의는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들이 통합진보당을 창당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진보신당 다수파와 사회당이 통합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노동당 일부 세력·인물이 탈당하면서 완전한 통합과 거리가 멀어졌다. 게다가 2012년 통합진보당에서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이 분당된다. 같은해 진보신당과 사회당은 통합해 현 노동당으로 맥을 이어 갔다.

지난해에는 노동당·노동정치연대·민주노총·정의당의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진보교연)이 진보혁신회의를 꾸렸다. 통합논의에 앞선 라운드테이블 성격의 모임이었다. 통합진보당이 논의대상에서 빠진 것을 두고 민주노총 내부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다 노동당이 당내 의견수렴을 거쳐야 한다며 진보혁신회의에서 빠졌다. 같은해 9월 진보혁신회의는 좌초했다.

통합 실패에서 교훈 얻을까

2011년과 지난해 진보통합 논의과정은 각 정치세력 내 다수파가 소수파 의견을 적극 반영해야 통합 과정에서 불신이 생기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최근 당내 동의 문제로 골치를 앓는 쪽은 노동당이다. 2011년에는 통합세력이 소수파였지만 최근에는 다수파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나경채 노동당 대표는 올해 1월 당대표 선거에서 '진보재편·당원총투표·제1야당 교체'를 기치로 당선됐다. 결선투표에서 53.4%를 얻어 노동당 강화를 내건 나도원 후보(46.6%)를 눌렀다.

그럼에도 진보통합 논의 참여 여부에 대한 노동당 내부갈등은 선거 후 오히려 격렬해지고 있다. 노동당 관계자는 "진보재편에 관한 당원들의 의사가 아직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며 "당원들의 총의를 모으는 절차를 밟고 있는 만큼 결과에 따라 일치된 입장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당은 대체로 진보통합에 긍정적이다. 지난 2월22일 정기당대회에서 정의당은 진보재편을 내용으로 하는 특별결의문을 채택했다. 물론 암초도 있다. 정의당 내부 국민참여당 출신 당원들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참여하는 국민모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 정의당 관계자는 "국민모임이 정동영 사당도 아니고 알려진 만큼 당원들이 거부감을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다"며 "진보재편에 대한 공감대는 충분히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5월30일 전국위원회를 열어 진보통합 논의와 관련한 의견을 정리할 계획이다.

국민모임은 창당과 진보결집이란 두 선택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4·29 재보선 패배 이후 진보결집에 무게가 쏠리고 있지만 창당을 한 뒤 통합을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선택 과정에서 정동영 전 장관과 그를 중심으로 모인 야권인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도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국민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계 출신 인사는 "창당보다는 진보통합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김세균 국민모임 상임대표는 이달 3일 성명을 내고 "모든 진보적 정치세력이 작은 차이와 기득권을 넘어 연대·통합할 수 있도록 국민모임 역시 살신성인의 자세로 역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옛 통합진보당과 관계설정 어떻게 하나

4자 진보결집에 성공한다더라도 통합은 완벽하지 않다. 옛 통합진보당은 정당해산이라는 아픔을 겪었지만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해산 전 10만 당원과 전국 조직을 가진 통합진보당은 4자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들을 규모 면에서는 압도한다. 대구·울산·광주·전남·경남 등 광역시·도를 중심으로 정치적 성격이 뚜렷한 단체를 구성하면서 정치활동도 본격화하고 있다. 옛 통합진보당은 재보선에서 향후 취할 정치적 입장을 뚜렷하게 보여 줬다. 재보선 선거운동에 참여한 옛 통합진보당 관계자는 "서울 관악갑 이상규 후보와 광주 서구을 조남일 후보의 사퇴는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을 심판하고 진보세력과 연대한다는 입장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다른 진보후보가 나오지 않은 성남 중원은 김미희 후보가 완주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이 직접 싸우는 모습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옛 통합진보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는 진보통합 논의 과정에서 풀기 어려운 사차방정식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홍성규 옛 통합진보당 대변인은 "기존 진보정당보다 넓고 깊은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적 고민에 이견이 없다"며 "박근혜 정권의 폭주를 막고 이를 위해 진보대통합당 건설과 야권연대 성사가 필요한 만큼 총선 과정에서 단합할 수 있도록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정치방침도 진보통합 변수

진보통합의 마지막 변수는 민주노총이다. 한상균 위원장 체제의 민주노총은 정치위원회 가동을 중단하는 등 정치세력화 논의에서 한발 빼고 있다. 한상균 지도부가 변혁적 계급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 철회를 줄곧 요구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달 중순 열린 민주노총 사무총국 수련회에서는 정치전략 부재에 대한 내부 비판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총파업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면서 정치방침 논의가 중단되긴 했지만 차차 현 집행부의 문제의식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하반기부터 내년 초 정기대의원대회까지 단일한 총선방침을 정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가 전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보통합은 2008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갈라선 후 진보세력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2015년 제 진보세력이 이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오리무중이다. 이병렬 노동정치연대 집행위원은 "내년 총선에서 각자 행동할 경우 진보정당이 노동자나 조직된 대중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크다"며 "주어진 과제나 난관이 많지만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일련의 통합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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