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비정규직지부는 지난 4월26일 한국경총과의 임단협을 체결함에 따라 고공농성을 해제했다. 윤성희 기자
"복직 합의가 될 듯하다가도 계속 안 되는 게 가장 힘들죠. 어제는 사장이 한 달 보름 만에 연락해서는 조합원들을 고소했다고 하더라고요."

지난 21일 서울 중구 SK브로드밴드 본사 앞에서 만난 SK브로드밴드 충주제천홈고객센터 서비스기사 강준호(31)씨가 한숨을 쉬었다.

충주센터는 지난해 10월 강씨를 비롯한 조합원 8명의 고용승계를 거부했다.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비정규직지부와 협력업체 교섭을 대리한 한국경총은 올해 4월 표준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하고 각 센터 해고자를 복직시키고 노사 간 법적 다툼을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강씨는 복직 길이 열릴 것으로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센터는 복직 요구를 거부했다. 현재 조합원들은 서울에 남아 원청 책임을 촉구하는 농성을 하고 있다. 해고 상태가 8개월째 이어지면서 실업급여도 바닥이 났다.

강씨는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는데 보러 가지도 못하고 있다"며 "중앙교섭을 해서 그렇게 어렵게 단체협약을 체결해도 사장이 안 지키면 그만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토로했다.

단협 체결됐지만 복직 못한 채 임금만 떼이고

오랜 파업과 농성 끝에 단협을 맺은 전자통신 분야 간접고용 사업장에서 또다시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협력업체는 어렵사리 맺은 협약을 무시한다. 진짜 사장인 원청은 협력업체 뒤에 숨어 모르쇠로 일관한다.

SK브로드밴드는 곳곳에서 단협 위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SK브로드밴드 부천홈고객센터 재하도급업체 ㅂ사는 최근 조합원들에게 퇴직금 공제분을 포기해야 임금을 주겠다고 통보했다. 이를 거부하면 면책합의금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표준 임단협에는 그동안 업체가 퇴직금 적립 명목으로 차감했던 급여를 돌려주고, 노조가 소송·진정을 철회하는 대신 면책합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게다가 ㅂ사는 임금을 두 달씩 밀려 지급하고 있다. 제때 지급하지도 않는 월급을 무기로 협약을 무력화하고 있는 셈이다.

ㅂ사를 관리해야 할 부천센터 운영업체는 "ㅂ사에 수수료를 지급했고 나머지는 ㅂ사의 소관"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이어 "6월30일에는 센터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협약을 지켜야 할 당사자가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노조는 해당 업체에 대한 제재조치를 원청에 요구하고 있다.

고양서부홈고객센터는 임단협에서 신설한 보전수당과 기존에 지급해 온 성과급을 일방적으로 삭감했다. 이 밖에 임단협에서 보장하기로 한 면책합의금이나 생계대출금, 업무용 장비 지급이 대부분의 센터에서 지연되고 있다.

협약 위반에다 일감 차별 갈등 잇따라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비정규직지부 교섭의 기준이 됐던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회는 지난해 6월 두 달여의 노숙농성 끝에 한국경총과 기준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분회별 후속 보충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단협 위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서울 영등포센터와 양천센터는 단협으로 보장돼야 할 근속수당·장거리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업무용 공구와 업무차량 유류비는 거의 대부분의 센터에서 지급되지 않고 있다. 지회에 따르면 단협이 제대로 이행된 곳은 40여개 지회 중 경기지역 6곳에 불과하다.

지회 영등포분회 대의원 정찬희씨는 "최근 원청이 전화상담 서비스를 확대하면서 센터 일감을 줄이니까 사장들이 단협을 안 지키려 한다"며 "사인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왜 나더러 (단협을) 지키라고 하느냐는 말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노동부에 진정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영등포분회는 지난해부터 6건의 임금체불·부당노동행위 진정을 제기했지만 결과가 나온 것은 없다. 그러는 사이 갈등만 커지고 있다. 정씨는 "기준협약상 업무를 월 60건 이상 처리하지 않으면 기본급만 받게 되는데, 회사가 조합원보다 비조합원에게 일감을 더 주고 있어 임금차이가 커졌다"며 "단협을 악용한 노조 흔들기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우려했다.

홍명교 지회 교육선전위원은 "삼성전자서비스나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처럼 실제 교섭주체들이 교섭테이블에 앉지 않는 대리교섭 구조에서는 단협 해석을 놓고 이견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일감과 고용을 사용자가 틀어쥔 상황에서 단협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홍 위원은 "경총을 배제하고 노사가 직접 대면하는 교섭구조를 만드는 한편 정부와 정치권이 교섭 과정뿐 아니라 합의가 이행될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접고용 단협, 사회적 보장 대책 필요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하청업체 노조의 교섭을 원청 노조가 지원하거나 노사정이 제도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연구위원은 "산별교섭이 어려운 국내 상황에서는 간접고용 노동자의 노동 3권과 교섭을 제도화하기 위해 정부 개입력을 높여야 한다"며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논의나 노정협약을 통해 간접고용 사업장의 고용승계율이나 단협 이행률 지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류하경 민변 변호사는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입법적 보완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중재하고 원청과 간접고용 노동자가 직접 대면하는 사회적 협의테이블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류 변호사는 "삼성전자서비스의 협약도 노동부 중재로 나온 것인데 정작 정부가 후속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며 "적어도 노동부가 중재한 합의가 이행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시행령을 제정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013년 12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른바 '원하청 교섭 촉진법'으로 불리는 개정안은 노동조건이나 노조활동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를 사용자 개념에 포함시키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노동자를 해당 사용자의 교섭당사자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국회에서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오민규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전략사업실장은 "상반기에는 최저임금 인상 활동이 핵심이라면 하반기에는 간접고용·특수고용 노동자 조직화가 중요하다"며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하는 노조법 제2조 개정 투쟁을 선포하고 하반기 정기국회에 법 개정을 촉구하면서 내년 4월 총선까지 투쟁 흐름을 이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강준호씨의 아이는 8월에 태어난다. 복직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기저귀 값 걱정이 태산이다. 강씨는 "반드시 복직해서 집밥 먹고, 가족여행도 가고 싶다"며 "원청과 센터장이 책임을 지도록 힘을 실어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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