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이 왜 저평가되는지, 저임금을 받는 여성의 삶은 어떤지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매일노동뉴스>는 20대부터 60대까지 10명의 여성노동자를 만난 노동사와 생애사를 들여다봤다.

① [70대·60대] 평생 일해도 제대로 인정받은 적 없는 경력
② [50대] 무력한 30년 경력 일용직·최저임금 갈림길에 서다
③ [40대] 양육과 돌봄 회전문에 매인 삶
④ [30대] 경력단절의 시작, 집으로 끌려 들어가는 엄마들
⑤ [20대] 비슷한 현실 다른 선택, 아이를 안 낳거나 조용히 사라지거나

⑥ [종합] 유연한 일자리, 성별 격차 해소할까, 심화할까

2024년에는 김묘순(71)씨, 윤정희(51·가명)씨처럼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부 혹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길 강요받진 않는다. 명시적 성차별은 분명 줄고 있다. 하지만 2022년 남성노동자 평균소득은 여성보다 1.53배 많고,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6년 1.58배에서 크게 줄진 않았다. 신성아(40), 우시은(38)씨의 삶이 보여주듯 엄마라는 이유로 무급 가사노동이 여성노동자에게 주로 전가되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 모두 일·가정 양립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동 장소와 시간의 유연화가 해법으로 제시되는 배경이다. 유연한 일자리는 노동시장 안 성차별, 성별 임금 격차 해소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커리어 희생하고,
무급 가사노동 도맡는 여성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일자리, ‘유연한 일자리’는 새로운 대안은 아니다. 다만 2023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라우디아 골딘의 제안으로 더 주목받고 있다.

골딘은 자신의 저서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서 부모가 모두 일·가정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노동자가 근무시간을 예측할 수 있고 원하는 때 휴가를 낼 수 있는 ‘유연한 일자리’를 제안한다. 유연한 일자리는 장시간, 불규칙한 노동을 요구하는 대신 높은 임금을 지급하는 ‘탐욕스러운 일자리’와 대비되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 부모 중 어느 한쪽은 부르면 즉시 달려 나가는 ‘온콜(on call) 노동’을 수행하게 되는데, 특히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하고 온콜 노동을 수행하면서 성별 격차가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골딘의 설명은 한국 사회에도 들어맞는다. 20대 정점을 찍던 여성의 고용률은 결혼 후 아이를 양육하는 30대 때 하락하고, 40대가 된 여성이 다시 노동시장을 향한다. 지난해 12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9년 여성의 무급가사노동 가치는 남성의 2.6배다. 경력단절 여성은 일자리는 구하는 과정에서 유연한 근무환경(22.1%)을 수입(32.2%)·일자리 안정성(24.7%) 못지않게 중시한다. 가사·양육을 일과 병행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유연한 일자리,
과거 실수 되풀이 안 돼

그렇다면 골딘의 ‘유연한 일자리’는 저임금에 갇힌 한국 여성을 구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의 전망은 낙관과 비관을 오간다. 다만 기존의 유연한 일자리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입장만큼은 같았다.

국내에서 유연한 일자리는 단시간(시간제) 근로제·시차출퇴근제·탄력근로제·재택근무·선택근로제·스마트워킹과 같은 노동형태다. 이 중 몇 개의 제도는 장시간 노동, 비정규직 양산의 주범으로 비판받는다. 시간제 일자리와 탄력근로제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여성의 고용 시장 참여 확대,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시간제 일자리 창출 정책에 힘을 쏟았다. 정부는 정규직 일자리와 차별 없는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정책 이후 시간제 노동자는 가파르게 증가했지만 경력단절 여성 고용 확대보다는 2030 청년층과 고령노동자를 흡수해 대표적인 질 낮은 일자리로 자리매김했다. 2015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자발적 선택·최저임금 이상·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국민연금과 고용보험 가입 등의 조건을 충족한 양호한 시간선택제 일자리 비중은 2014년 전체 시간제 일자리 중 5.9%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시간제 노동자는 사용자가 전일제 노동자보다 유연하고, 값싸게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법정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도입된 탄력근로제도 노동계로부터 장시간 노동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동자가 사용자 필요에 따라 불규칙적인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탐욕스러운 일자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3월 추진하려다 실패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도 유연한 일자리의 대안이 될 순 없다.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연장근로 시간 관리 단위를 늘리고, 사업주 필요에 따라 장시간 일하고, 몰아서 쉬게 하자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에 불규칙한 노동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성공적인 유연 일자리는
노동자의 주권 확보가 전제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그렇다면 골딘이 대안으로 꼽은 유연한 일자리의 형태는 무엇일까. 결국은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가 자신이 일할 시간과 장소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공간주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서구처럼 주어진 법적 테두리와 노동계약 범위 안에서 회사가 아닌 노동자가 시간과 장소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시차출퇴근, 육아근로시간 단축 등 주 40시간 범위 내에서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조정하고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시차출퇴근제나 재택근무와 같은 유연근무제는 이미 한국 사회에 도입돼 노동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소가 수행한 ‘2022년 전국 일-생활 균형 실태조사’에 따르면 유연근무제 대상자 1만5천862명 가운데 90% 가까이가 “일-생활 균형에 도움이 됐다”고 응답했다. 긍정 답변은 시간선택제(93.6%), 시차출퇴근제(93.5%) 선택근무제(89.9%), 재택근무제(87.3%), 원격근무제(85.3%) 순으로 높았다. 다만 유연근무제는 주로 남성, 상용근로자, 관리자·전문가와 사무종사자, 정규직, 조직 규모가 클수록 도입 비율이 높다. 유연한 일자리를 중소 규모의 민간기업으로 확대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변수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처럼 장시간 노동을 권장하고 경직된 조직문화를 가진 곳에서 유연한 일자리가 쉽게 안착하기 힘들 수 있다”며 “특히 영세기업, 중소기업에 주로 재직하는 여성들의 조건을 고려하면 유연한 일자리 확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성평등 눈높이로 세상 바라봐야”

유연한 일자리 확대는 전체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윤자영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법정 근로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며 “우리나라는 근로시간 자체가 너무 길다. 가족 중에 누군가 주 52시간까지 일하는 직장에 다니면 가사나 돌봄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넘어가기 때문에 서로 연결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가정 양립 가능한 노동시장을 만들기 위해 노동계가 보다 적극적으로 유연한 일자리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과거 노동유연화는 비정규직 확대와 같은 말이었기 때문에 노동계는 유연근무제에 대단히 부정적”이라며 “노조가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노동시간과 장소를 바꾸는 것을 원치 않고, 굉장히 불편하게 여긴다”고 꼬집었다. 그간 한국의 조직노동을 이끈 주요 세력은 풀타임 근무 후 야근을 하고 집에서는 쉬는, 즉 가사·양육 부담을 지지 않는 남성노동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유연한 일자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여성의 시각, 성평등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노동시장 안 성별 격차와 같은) 문제에 대해 접근해야 답이 보인다”며 “국가가 정책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굉장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성별 임금격차를 부추긴 국가는 성별 임금 격차 해소에 이렇다 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시차출퇴근제와 같은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인데 성평등 관점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정책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특별취재팀=강예슬·강석영·어고은·정소희·임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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