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2000년 10월17일 영국 해트필드에서 열차가 탈선하면서 4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영국의 철도 민영화 민낯을 드러낸 사고로 알려져 있다. 당시 사고조사에 따르면 사고 발생 구간에서 35미터 이상의 선로가 300개 정도 조각으로 쪼개져 있었다. 이후 다른 철도 구간을 조사한 결과 1천286곳 선로에 균열이 확인됐다. 당시 영국은 철도 민영화를 추진한 상태로, 인프라기업인 레일트랙은 이런 형태의 선로 결함을 알고도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정부가 철도 상하 분리를 재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 안전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철도 상하 분리로 인한 사고가 잇따랐는데도 정부는 경쟁체제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노동계는 철도 안전을 위해서라도 재통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03년 건설·운영 분리 뒤
유지보수는 철도공사 담당

철도 상하 분리는 열차 운영·운송 부문(상부)과 시설 건설·유지 부문(하부)을 분리해 서로 다른 기관이 운영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영국이 철도 관련 국가 부채와 산업 내 경쟁체제 구축을 명분으로 국철을 민영화하기 위해 두 부문을 분리한 게 대표적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는 외환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삼은 김대중 정부가 처음 추진했다. 1999년 철도구조개혁 실행 방안 개발 연구용역에 이어 2001년 해당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상하 분리에 착수했다. 하부는 공단화하고, 상부는 공기업 전환 뒤 민간에 지분을 매각하는 단계별 민영화 계획이다. 2003년 뒤이은 노무현 정부는 단계별 민영화는 철회하고 공기업 전환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시설 유지보수 업무가 쟁점이 됐는데, 격론 끝에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맡는 방식으로 철도산업법을 2003년 제정하면서 일단락됐다. 다만 불씨는 남았는데 같은 시기 제정된 한국철도시설공단법(현 국가철도공단법)은 공단 시행 사업 일부를 민간위탁 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만약 철도산업법을 개정해 건설 외 유지보수 업무를 공사에서 공단으로 이관하면 곧바로 민영화 경로가 열린다.

조응천 의원안 폐기되더니 이번엔 ‘국토부’

이 대목이 철도노조가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철도산업법 개정안에 민감하게 반응한 배경이다. 조 의원 입법안은 38조의 단서조항 “다만 철도시설유지보수 시행업무는 철도공사에 위탁한다”를 삭제하는 내용이 뼈대다. 현재는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윤석열 정부가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14일 철도산업법 38조 단서조항을 삭제하고, 권한 위임·위탁기관에 ‘한국철도공사 등 철도사업자’를 포함하는 내용의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국가철도공단을 포함한 공공기관만 유지보수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민간사업자 참여를 배제할 수 없다.

국내 환경에 맞지 않다는 비판이 많다. 2017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철도 개혁 보고서에 따르면 철도 상하 분리가 용이한 조건으로 ‘시장 내 여러 유형의 경쟁 사업자가 존재하는 대규모 철도 환경’과 ‘강력한 행정 및 규제 역량을 갖춘 국가의 존재’를 꼽았다. 이와 달리 ‘개별 국가 단위의 소규모 철도 시장이 있는 곳’은 철도 상하 분리에 불리하다고 봤다.

국내도 강릉선 KTX 탈선 등 부작용 잇따라

우리나라는 제한적인 상하 분리에도 사고가 잦다. 대표적인 게 2018년 12월8일 발생한 강릉선 KTX 탈선사고다. 강릉을 출발한 KTX 열차가 탈선한 사고로, 사망자·중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탑승객과 승무원 201명 중 15명이 경상을 입었다.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조사에서 시공 및 신호 설비 테스트 과정이 진행되지 않았던 점이 지적되면서 건설과 시설 유지보수가 나뉜 현행 체계의 문제가 드러났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공사 과정에서 신호케이블이 잘못 연결됐는데, 공사 도면 등은 공단에 있는 상태에서 유지보수 업무를 맡은 코레일은 결함을 파악할 수 없으니 관리도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다.

이 밖에도 상하 분리 직후인 2007년 가좌역 노반붕괴 사고나 2009년 경의선 서울~신촌역 간 타워크레인 전도사고, 2011년 신경주역의 미검증 선로전환기 도입과 경원선 토사 유입 사고 등이 상하 분리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발생한 사고로 꼽힌다.

이승우 민주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전 세계적 추세는 상하 분리보다 상하 통합이, 민간 사업자보다 공적 지배구조하의 운영이 중추적”이라며 “상하 분리 경향을 제거하고 철도 규모와 여건을 고려해 유지보수와 운영을 일원화해야 안전과 효율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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