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산재 사망사고를 일으킨 사용자가 손해배상 소송 중 패소하자 파산을 신고해 유족들이 민사상 손해배상액을 받지 못하게 된 것으로 드러났다. 회사가 폐업·파산하는 경우 산재 피해자나 유족이 민사상 금액을 보전받지 못하는 제도적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비면책채권 등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장 추락사’ 소송, 1·2심 “배상 책임”

8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추락사로 숨진 공장 노동자 A(사망 당시 45세)씨 유족이 회사 대표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산) 소송 상고심에서 최근 원심 중 피고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각하했다.

A씨는 2007년 4월부터 B씨와 근로계약을 맺고 일하던 중 2016년 7월 높이 7.8미터인 공장 크레인에 올라가 천장의 화재감지기를 점검하다가 약 8미터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수사 결과 B씨는 A씨에게 화재감지기 작동점검을 지시하면서 안전모와 안전대를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공장에는 방호망 등 추락방지 시설도 없었다.

이 사고로 B씨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업무상과실치사죄로 재판에 넘겨져 2017년 8월 벌금 1천만원을 선고받아 확정됐다. 이와 별개로 A씨 배우자와 자녀는 2017년 10월 회사를 상대로 총 3억3천여만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B씨의 책임을 70% 인정해 유족에게 총 1억1천5백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망인의 생명·신체·건강을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으므로, 그로 인한 망인과 원고들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도 A씨가 안전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점을 고려했다.

B씨는 화재감지기 점검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업무 현장에서 근로자는 항상 구체적인 업무를 일일이 지시받아 수행할 수 없다”며 “전체 업무를 위해 필요한 작업은 명시적으로 금지돼 있지 않은 한 스스로 판단 아래 수행할 수도 있고 그러한 경우에도 사용자의 보호의무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받은 유족급여와 A씨의 공탁금을 A씨의 일실수입 액수에서 공제했다. 2심 판단도 같았다.

상고심 중 파산 ‘중국인 노동자 화상’ 유사 사례

그런데 2심 이후 B씨의 태도가 돌변했다. 2020년 2월 상고한 뒤 갑자기 법원에 파산면책신청을 한 것이다. 창원지법은 그해 10월 파산선고를 결정하고 이듬해 5월 면책결정을 내려 확정됐다. 대법원은 ‘파산’을 이유로 원심을 파기했다. 면책결정이 확정되면 파산절차에 따른 배당을 제외하고 채권자에 대한 채무의 전부 책임이 면제된다.

대법원은 “피고에 대한 면책결정이 확정됨에 따라 청구채권이 가지는 소 제기 권능이 상실돼 이 사건 소는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며 “원심 판결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에 직권으로 원심을 파기하고 자판했다. 파기자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한 경우에 환송하지 않고 사건을 직접 재판하는 것을 말한다.

B씨 파산에 따라 소송이 각하되면서 유족들은 손해배상액을 전혀 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드물지 않다는 데 있다. 실제 공사장에서 중화상을 입은 중국인 일용직 노동자 C씨가 건설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해 올해 8월 일부 승소했지만, 이후 회사가 폐업한 탓에 배상받지 못했다. C씨는 다시 하청인 개인사업자를 상대로 소송을 낸 상태다.<본지 2023년 8월3일 “‘전신화상’ 외국인 노동자, 재판에서 드러난 ‘부실수사’” 기사 참조>

법조계 “산재 배상도 비면책채권 입법 필요”

제도적 허점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임금·재해보상금 등은 다른 채권에 앞선 우선변제권이 있지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상 산재보험금을 지급하면 근로기준법에 따른 사용자의 재해보상 책임은 면제된다. 그런데 산재로 인한 손해배상 채권은 ‘비면책채권’에 해당하지 않아 사용자가 파산할 경우 실효성 있는 구제가 쉽지 않다. 비면책채권에는 조세·양육비·임금·퇴직금·재해보상금·불법행위 손해배상 등이 해당된다.

문은영 변호사(법률사무소 문율)는 “비면책채권인 임금채권처럼 산재로 인한 손해배상 채권을 별도로 비면책채권으로 입법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빛나라 변호사(오빛나라 법률사무소)는 “영세한 회사가 폐업하거나 파산해 재정적 능력이 없으면 재해자는 산재보험을 초과하는 손해에 대해 현실적으로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며 “특히 산재보험 비급여 항목이 많은 상병의 경우에는 금전적인 부담까지 오롯이 감당해야 해서 근재보험 의무 가입 등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익찬 변호사(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도 “임금채권과 같이 우선변제 받을 수 있는 입법적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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