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건설현장에서 중화상을 입은 일용직 중국인 노동자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이후에서야 사건 관계자에 대해 경찰이 내사종결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업무상과실치상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수사조차 착수하지 않았다. 산재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는 형사사건에 관여하기 쉽지 않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추위 견디려고 알코올에 불붙이다 중증 화상
경찰, 사고 5개월 만에 ‘속전속결’ 사건 종결

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64단독(하효진 판사)은 중국인 노동자 A씨가 경기도 시흥 소재 건설사 B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산) 소송에서 최근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사고 발생 이후 1심 결론에만 6년이 넘게 걸렸다.

사고는 첫 출근일에 일어났다. A씨는 2017년 2월6일 오전 7시께 경기도 안양 오피스텔 신축공사 현장 8층 옥상에서 작업하던 중 추위를 피하려다가 사고를 입었다. 통에 담긴 고체 알코올에 불을 붙여 몸을 녹이다가 불이 꺼진 줄 알고 액체 알코올을 붓던 중 불길이 온몸에 번졌다. 동료 인부들은 ‘펑’ 소리와 함께 A씨 몸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119에 신고했다.

이 사고로 A씨는 머리와 목 등 신체의 52%에 화염화상을 입고, 왼쪽 손가락 일부를 절단해야 했다. 왼쪽 견관절과 손가락에 영구장해가 생기는 등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 휴업·요양·장해급여를 지급했다. 그러자 A씨는 변호사를 선임해 회사를 상대로 산재로 입은 손해와 위자료를 달라며 2020년 7월 소송을 냈다.

그런데 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B사 사업주의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를 2017년 7월 ‘내사종결’로 마무리한 사실을 지난해 12월 확인했다. 사고 5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사건이 끝났다. A씨는 중화상을 입어 치료에 전념하느라 형사사건에 대해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 사고 발생 5년이 넘도록 경찰의 수사 사실을 몰랐던 셈이다.

경찰은 A씨의 부주의가 크다는 이유로 범죄 혐의가 없다고 봤다. 내사결과보고서에는 “현장에서 사용하는 알코올을 사용할 때 관리자 허락 없이 임의로 사용해 발생한 사건”이라며 “산업안전보건법상 알코올에 대한 관리 규정이 명시돼 있지 않고, 추상적으로 인화성 물질의 위험에 관해서만 규정돼 있어 명시적인 의무규정을 찾기 어렵다”고 적혔다. 사업주의 의무위반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 의견도 근거로 삼았다.

법원 배상책임 인정했으나 재해자는 ‘충격’
“외국인 이유로 부실수사, 형사절차 개선돼야”

회사가 제출한 증거목록을 보지 못했더라면 내사종결처분 사실도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A씨는 벌금형에 불과한 형사처벌이 예상돼 별도의 불복절차는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재판부에 과실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A씨를 대리한 오빛나라 변호사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부실하게 수사해 법리적인 판단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다”며 “민사사건은 생계가 달린 중요한 사항이므로 충실하게 심리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B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하 판사는 “공사현장에 난방기구가 없어 인부들이 겨울 새벽 추위를 견디기 위해 알코올을 콘크리트 양생 작업에 사용하는 통에 넣어 난로 대용으로 사용했다”며 “B사는 난방기구를 제공하고 안전교육을 실시하거나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과실이 있다”고 지적했다. 콘크리트 공사를 하도급한 개인사업자 C씨에게 A씨가 고용된 것이라는 사측 주장에 관해서도 하 판사는 “B사 현장소장이 공사현장에 상주하며 공사 전체를 관리·감독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배척했다. 다만 피해자 과실을 일부 인정해 회사의 책임비율을 50%로 제한했다.

A씨는 내사종결 결과를 알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오빛나라 변호사는 “외국인 노동자는 언어 소통에 한계가 있어 고소 등 형사절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워 부실수사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며 “수사기관이 통역 등을 통해 형사절차 진술권을 두텁게 보장해 수사진행 결과를 정확하게 통지하는 등 형사절차가 개선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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