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시각장애인인 시각장애인 조영규씨에게 애플의 전자기기는 ‘필수 아이템’이다. 화면 속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스크린 리더(화면낭독) 프로그램을 따로 설치하지 않아도 운영체제 내에 스크린 리더 기능이 탑재돼  있기 때문이다.    정기훈 기자
▲중증 시각장애인인 시각장애인 조영규씨에게 애플의 전자기기는 ‘필수 아이템’이다. 화면 속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스크린 리더(화면낭독) 프로그램을 따로 설치하지 않아도 운영체제 내에 스크린 리더 기능이 탑재돼  있기 때문이다.   정기훈 기자

“이 세상에서 나를 존중하는 건 애플뿐이구나. 그런 말도 하죠.”

한 손에 아이폰을 쥔 채로 조영규(33)씨가 웃으며 말했다. 중증 시각장애인인 그에게 애플의 전자기기는 ‘필수 아이템’이다. 화면 속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스크린 리더(화면낭독) 프로그램을 따로 설치하지 않아도 운영체제 내에 스크린 리더 기능이 탑재돼 있어서다. 후천적 장애인으로 살아보니 한국은 불편하고 짜증나는 게 너무 많았다. 그 때문에 “기가 막힐 정도로 편리한 건 아이폰뿐”이라는 농담을 하게 됐다.

영규씨는 마주 보는 사람의 형체 정도만 알아보는 시력을 갖고 있다. 18살에 ‘레버씨 시신경 병증’이라는 희귀성 질환이 갑자기 발병하면서 중심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발병 3개월 만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16년차 장애인’이지만 “갑자기 찾아온 장애에 대한 분노는 여전하다”고 그는 말했다. 이후 대학원에서 장애학을 공부하며 분노의 방향은 바뀌었다. “낫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사회변화에 대한 바람으로 이어졌다. 시각장애인의 접근성을 결여한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한다. 중증 시각장애인의 ‘일자리’ 문제에 대해 당사자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 것도 장애학을 공부하면서부터다.

“시각장애인 구직 공고 1년에 2건?”

30대 초반 청년인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고민은 ‘밥벌이’다. 그 역시 한국의 다른 청년과 마찬가지로 20대 내내 구직에 매달렸다. 영규씨는 예술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하면서도 항상 일자리를 염두에 뒀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장애 인식개선 강사,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 등 관심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자격을 취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구직 기간은 기약 없이 길어졌다. 영규씨의 ‘일자리 표류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취업할 곳 자체가 없었다. 장애를 가지고 취직하는 것이 쉽지 않으리란 각오는 있었다. 하지만 일할 곳 자체가 없는 건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시각장애인을 뽑는 구직 공고를 계속 찾아봤어요. 그런데 1년에 2건 정도 올라올까? 그나마 복지관이나 카페에서 공고를 내더라고요. 돈을 안 벌 수는 없어서 하루 4시간짜리 재택근무 일자리를 알아보게 됐어요. 그걸 2년간 하면서 풀타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죠.”

“정규직으로 입사한 일터,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해”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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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씨는 서른한 살이 돼서야 첫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서울 도봉구에 위치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였다. 하지만 한 달 반 만에 해고됐다. 보안문서를 근로지원인에게 보여줬다는 이유였다. 지체장애인 관리자는 영규씨에게 ‘사업계획서’를 출력된 문서로 건넸다. 글자를 읽는 게 불가능한 영규씨는 문서를 스크린리더로 읽기 위해 파일로 달라고 요구했지만 “보안문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후 근로지원인에게 사업계획서 속 글자를 파일로 변환을 부탁했고 이 때문에 영규씨는 해고당했다.

이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장애인 지원 공공기관에 입사했다. 결재시스템과 국가보조금 시스템이 모두 스크린리더로 접근되지 않았다. 장애인을 지원하는 기관이라는 희망을 갖고 입사했지만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다 자진 퇴사했다.

세 번째 회사는 경기도의 한 시각장애인복지관이었다. 관리자 역시 시각장애인이었고 당연히 이전 직장과 달리 장애인을 위한 제반 환경이 갖춰져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업무를 시작하는 시스템부터 화면낭독 프로그램으로 접근 불가능했다. 조씨는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을 채용한 사용자가 해야 할 정당한 편의를 제공받지 못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시정을 구하는 진정을 제기했고 이후 해고됐다.

하루 3.5시간, 중증장애인은 월 60시간만 일하라?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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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근직은 체념하게 되더라고요. 여러 일자리를 거쳤는데 또 내근직 일자리를 구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겁이 나고 (구직활동을)하기가 싫어졌어요.”

영규씨는 그때부터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풀타임 정규직은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영규씨가 주로 일자리를 알아보는 곳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취업정보 게시판이다. 이곳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일자리는 하루 3.5시간에 맞춰져 있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하루 4시간 근무시 30분의 유급 휴게시간을 지급하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놓은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2개 이상 하면 풀타임 일자리만큼의 수입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중증 시각장애인’인 영규씨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자리가 뚜렷한 법적 근거 없이 ‘겸직금지’를 취업 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면서 겸직금지를 명시하니 일자리 선택의 폭이 줄었다.

일부 채용공고는 중증장애인을 우선했다. 단 월 60시간을 갓 넘긴 수준으로만 채용했다. 중증장애인은 월 60시간 미만으로 채용해도 장애인 1명을 고용한 것으로 산정하고, 월 60시간을 넘으면 장애인 2명을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장애인고용법)에 따라 상시근로자가 50명 이상이면 법령으로 정한 비율에 따라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채용해야 한다. 상시근로자 100명 이상 고용사업주는 의무고용을 이행하지 않으면 부담금을 낸다. 월 60시간의 기준은 중증장애인 고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중증장애인은 경증장애인보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이 때문에 4대보험 의무 가입 기준인 월 60시간 미만 일자리만 제공해도, 즉 사업주의 지출이 적어도 장애인 고용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중증장애인 고용촉진을 위한 월 60시간이라는 기준은 역설적으로 중증장애인 일자리가 ‘월 60시간+@’로 설계하도록 묶어버렸다. 1명의 장애인을 채용하고도 2명을 채용한 ‘효과’를 기대하는 기업들은 하루 3.5시간, 월 70여시간의 초단시간 일자리만 양산하게 된 것이다.

“장애인은 의무고용률 머릿수 채우는 존재인가요”

오랜 도전 끝에 영규씨는 현재 하루 3.5시간 문서작업을 하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다음달 21일 그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제목의 연극을 ‘입봉작’으로 올린다. 극작가라는 정체성을 지닌 그에게 재택근무 아르바이트는 나름의 부업이 되어준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여전히 ‘하루 8시간 내근직’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그의 정체성은 ‘중증 시각장애인 노동자’가 되길 바란다.

“중증장애인 고용을 촉진한다는 의도와 달리 이 제도는 장애인을 하루 3.5시간 이하, 한 달에 80만원만 받고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듭니다. 장애인은 한 달에 그 정도만 받고 살아도 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장애인을 노동자가 아닌 의무고용률 머릿수 채우는 용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저 한 명의 시각장애인 노동자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연습실에서 중증 시각장애인이자 극작가인 조영규씨가 연극 배우들과 함께 대본 연습  중이다.<정기훈 기자>
지난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연습실에서 중증 시각장애인이자 극작가인 조영규씨가 연극 배우들과 함께 대본 연습  중이다.<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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