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평소 기저질환인 ‘고혈압’이 있더라도 업무관련성을 고려하겠다는 취지로 고용노동부 고시가 개정됐는데도 이를 반영하지 않은 근로복지공단 산재 불승인 판정은 위법하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고혈압에도 불구하고 업무가 질환 악화나 뇌혈관 질병 발병에 영향을 미쳤는지 따져 봤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개정 고시는 고혈압을 진단받은 적 있는 노동자가 고혈압을 관리하지 않아 뇌혈관 질환이 생겼다고 본 과거 고시의 ‘반성적 고려’에서 개정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이트진로 노조 간부, ‘구조조정’ 영향 뇌출혈

19일 <매일노동뉴스> 취재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9-1부(김무신·김승주·조찬영 부장판사)는 하이트진로 노동자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최근 1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씨는 2008년 1월 입사한 뒤 2013년 7월부터 총괄지원팀에서 근무하며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하이트진로지부 대의원을 맡았다. 그런데 2017년 3월29일 지부 사무실에서 지부장과 대화하던 중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병원 진료 결과 ‘고혈압성 다리뇌출혈 및 사지마비’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공단은 A씨의 요양급여 신청을 거부했다. A씨는 소송을 냈지만 2019년 9월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A씨는 2020년 3월 재차 요양급여를 신청했으나 또 불승인됐다. 뇌출혈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재심사 청구마저 기각되자 A씨는 2021년 10월 두 번째 소송을 제기했다.

공단, 기존 고혈압 근거로 요양급여 불승인

하이트진로가 시행한 ‘희망퇴직’이 뇌출혈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A씨는 “하이트진로가 2017년 3월께 희망퇴직을 시행하면서 업무가 늘었고, 이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그런데도 공단은 노동부 고시의 개정 취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A씨가 언급한 개정 고시는 2018년 1월1일 시행된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 질병 및 근골격계 질병의 업무상 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이다. 과거 고시(2016년 7월1일 시행)가 업무상 재해 인정에 지나치게 엄격했다는 반성적 고려에 따라 개정됐다. 업무상 부담 여부를 판단하는 요소로 ‘해당 근로자의 건강상태’ 부분이 삭제된 것이 핵심이다. 공단은 “법원에서는 기초질환만으로 업무관련성을 부인하지 않는 경향이므로 이를 고시에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공단은 A씨의 고혈압을 주된 근거로 요양급여를 불승인했다. 1심은 공단 판정을 수긍했다. 증상 발생 전 24시간 이내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하거나 급격한 업무 환경 변화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만성과로도 아니며 업무시간이 인정기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미 A씨가 2011년 뇌출혈로 치료받았는데도 관리하지 않고 음주와 흡연을 계속했다고 지적했다.

2심 “개정 고시 취지 미반영, 업무부담 가중요인 해당”

하지만 2심 판단은 달랐다. 고시가 개정된 취지가 A씨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고 고혈압만으로 업무관련성을 부인하면 안 된다고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공단은 산술적으로 평가한 원고의 업무시간과 함께 기초질환(고혈압)을 주된 근거로 처분을 했던 점에서 개정 고시 취지가 충분히 반영됐다고 볼 수 없다”며 “업무시간은 업무상 과로 여부를 판단할 때 하나의 고려 요소에 불과한 점에서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A씨의 발병 전 4주간 1주 평균 업무시간은 43시간9분, 12주간 1주 평균 업무시간은 37시간48분으로 조사됐다. 과로로 인정하는 12주간 1주 평균 60시간과 4주간 1주 평균 64시간 근무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고혈압 증상은 업무상 질병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원고가 평소 정상적으로 근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상병 발생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 유무는 ‘원고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그대로 전제하면서 판단해야 한다”며 “고시의 개정 취지 등에 비춰 볼 때, 그러한 사정만으로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희망퇴직자 업무 인수인계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업무부담 가중요인으로 복합해서 작용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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