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지부 3지대장의 산화 이후 삭제된 ‘건설노동자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이들이 모였다. 인권, 노동안전, 미디어, 구술기록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건설노동자의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노동자 인터뷰를 보내왔다. 여덟 차례 걸쳐 싣는다.

2023년 5월1일,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조합원들은 원주시청에 모여 집회를 준비하던 중 양회동 지부 3지대장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양회동 열사는 6월21일 노동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 후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됐다. 열사의 동료들은 그의 분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지부 조합원 3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순하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김광영씨.
김광영씨.

지난해 강원지부 조합원이 된 김현웅씨는 분신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열사는 그에게 분신 십여분 전 자신의 사진 한 장을 보냈다. 현웅씨는 분신 소식을 들은 이후 정신이 없어 며칠 뒤에야 사진을 확인했다. 평상시와 같이 머리띠 매고 배지를 달고 투쟁하러 나가는 모습이지만 어딘가 달랐다. “내가 간다, 임한다, 투쟁하러 간다는 느낌이 처음 받은 감이었어요. 지금은 마지막을 부탁한다는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18년 6월 지부 설립 때부터 활동한 김광영씨는 건설노조 강원본부에서도, 강원건설지부에서도 ‘열사’는 처음이라고 했다. 자신이 평상시 알던 양회동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 여겼다. 그가 기억하는 양회동은 순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분신하기 며칠 전에도 같이 회의하고 술 마시고 장난도 쳤던 사람이었다. 광영씨는 단체협약에 있는 내용으로 활동한 거니 구속되지 않을 거라고 주변에서 이야기했는데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열사의 유서를 보고 나서 “힘들고 어려운 걸 (회동이가) 혼자 끝까지 지고 갔다”며 미안했다. “우리가 양회동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잘 몰랐구나. 자기 신념으로 지키고 싶었던 게 진짜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왜 양회동은 열사가 돼야 했을까

김현웅씨.
김현웅씨.

지대장을 하라고 권했던 사람들, 말다툼했던 사람들 모두 스스로를 가해자라 생각해 부채감을 안고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현웅씨는 전체 간부회의에서 자기 주장을 잘 안 하던 양 지대장이 ‘공안탄압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는 안건을 냈을 때를 되뇌었다. 정부는 없는 법도 만들어서 우리를 탄압하는데 우리는 없는 방법이라도 보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 열사의 발언이었다. 같은 철근노동자였던 세호씨는 분신 소식 이후, 10여 년 동안 끊은 담배를 다시 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열사가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럽고 뜨거웠을까를 떠올린다. 노조간부들은 화도, 눈물도 넘쳐 서로를 할퀴고 침체하기도 했다. 그래도 광영씨는 “모두가 그러면 안 되니까 정신 차리려고” 노력하고 있고 물러서는 비겁함은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양회동 열사가 분신한 그날 오후, 법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양회동과 함께 구속영장이 청구된 2명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강행했다. 자책과 후회, 분노를 끌어안고 싸워 왔던 그들은 양회동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며 맘이 편치 않았다. 현웅씨는 문제 해결이 안 된 채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 분했다. 열사에게는 미안했다. 그렇다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제일 걱정한 건 장례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 투쟁’으로 치부되는 것이었다. 양회동 열사가 원하는 장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열사는 본인의 모든 걸 걸었죠. 투쟁의 돌파구가 되길 원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용감하게, 주눅 들지 말고 투쟁에 나서야 한다. 탄압받으면서 계속 그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얘기한 거죠.”

지금 김현웅씨는 양회동 열사가 조합원들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양회동팀’을 만들어 열사정신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세상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누구도 모든 것을 걸고 나서지 않는데, 왜 형님이 그래야 했는지” 열사에게 묻지 못하기에 그 답을 스스로 찾아서 그렇게 이어 가려 한다.

마지막까지 지킨 자존심과 도리

홍세호씨.
홍세호씨.

장례 이후 정부의 건설노조 탄압과 건설노조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광영씨는 여전히 열사 얘기가 나오면 공기가 무거워지지만 열사 1주기에는 “우리가 탄압을 극복하고 무너지지 않고, 조합원들 일 다 시키고 있어. 회동아, 네 동네에서 같이 하는 동지가 두 배로 늘어났어”라고 말해 주고 싶다고 한다. 요즘도 그는 열사정신 계승, 건설노동자 탄압중단 현수막을 게시하고 있다. 세호씨도 그랬다. “건설노조 조끼 입고 있는 사람이 우리 팀 12명이 아니라 120명이 됐고, 그들이 한 달에 20일 이상 25일 일해서 임금을 이만큼 받고 있다고 임금명세표 120장을 갖다드리고 싶어요.”

열사는 조합원들 일자리 마련이 자기 몫의 도리라 여기고 회사의 싫은 소리 들어가며 일했다. 그런데 지금 조합원들은 일자리를 뺏기고 있다. 다시 인력사무소를 찾아 임금 일부를 뺏기고 날일을 가는 이도 있지만, 노조가 지켜 왔던 노동자 권리에 대한 자존심으로 인력사무소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이들도 있다. 대출을 받고, 아는 이들을 통해 겨우 일을 나가는 조합원도 있다. 광영씨는 건설사들이 법을 잘 지키면 노동자들이 회사와 부딪힐 일은 없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정부에게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당부했다.

“지역 집회할 때 새벽에 제일 일찍 나가서 앰프 세팅해 놓은 사람이 양회동이었고, 고된 상황에서 지침도 아닌데 윤석열 퇴진 촛불집회에 한 자리를 채운 것도 본인이 생각한 도리였을 거예요. 어쩌면 분신이라는 선택도 자기 할 도리를 하는 거라 생각했나 싶어요.”

현웅씨는 양회동 열사가 지킨 자존심과 도리를 말했다. 열사가 마지막까지 지켰던 ‘자기 도리’ 자리를 지금은 유족들과 동료들이 채우고 있다. 분향소가 세워졌던 전국 각지에서 추모촛불이 계속되고 있고, 건설현장의 잘못을 바로잡고 탄압하는 정권에 맞선 건설노동자의 투쟁도 이어지고 있다. 마트에서 일하는 열사의 배우자는 근무조를 조정해 건설노동자 집회에 함께하고, 열사의 형님도 집회가 있으면 열사의 목소리를 전한다.

정부와 건설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는 시민으로서의 도리, 노동자로서의 도리,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양회동을 기억하며 그의 뜻이 우리의 뜻으로 세워 가는 시간은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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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권미정 (김용균재단 운영위원장)
사진=건설노동자 목소리 인터뷰 기획팀
영상=선미(스튜디오한하), 효진(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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