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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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당하고. 이렇게 하는 게 짜증도 나고. 내가 왜 이렇게 태어났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농약을 마신 지적장애인 요양보호사 A씨가 2019년 5월 생전 중환자실에서 여동생과 나눈 대화 중 일부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여동생에게 ‘직장내 괴롭힘’을 호소했다. 여동생이 “B(동료 요양보호사)씨 그 사람이 계속 무시했어?”라고 묻자 A씨는 “내가 조금 손이 느릴 수 있는 건데, 못한다고 행동이 느리다고 뒷담화했다”고 호소했다. “아빠한테 이야기할 생각은 안 해 봤어?”라는 동생의 질문에 “그럼 그 XX들 더 악으로 나오겠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나이는 24세에 불과했다.

온갖 잡무에 휴일 근무, 동료는 직장내 괴롭힘

A씨는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사흘을 못 넘기고 눈을 감았다. 유족과 동료는 고인이 성실한 요양보호사였다고 입을 모은다. 2013년 지적장애 3급을 진단받았지만, 여러 차례 도전 끝에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경북 청송군의 C요양원에서의 위생원 근무 경험과 당시 원장의 격려가 도움이 됐다. 마침내 2017년 1월 C요양원에 입사했다. 매일 2~3킬로미터의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꾸준히 업무를 했다. 매달 약 170만원의 급여를 받으며 통장에 1천700만원을 저축하기도 했다.

그런데 원장이 바뀌며 문제가 시작됐다. 새 원장이 A씨에게 요양보호사와 무관한 일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유족측에 따르면 식자재 운반을 비롯해 폐기저귀 처리, 요양원 청소, 박스 정리 등 잡무를 떠넘겼다. 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요양원 이용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A씨를 야간근무에서 제외하고, 명절이나 공휴일에 근무시키기도 했다.

동료 요양보호사 B씨가 지속해서 괴롭힌 정황도 포착됐다. B씨가 A씨의 장애를 문제 삼으며 동료들 앞에서 무시하는 발언을 쏟아냈다고 한다. 동료 요양보호사도 B씨가 A씨에게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는 A씨가 숨지기 직전 여동생에게 털어놓은 얘기와 일치했다. 게다가 B씨는 A씨의 자전거를 마음대로 타고 다녔던 것으로 파악됐다. 자전거에 흠집을 내고 타이어에 구멍을 내 수리에 맡겨야 했다.

퇴근 뒤 자해, 공단은 ‘개인 소인’

결국 입사 2년4개월이 지난 2019년 5월15일 사고가 터졌다. A씨는 퇴근 이후 저녁 식사도 거른 채 혼자 방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왜 그러냐? 밥 먹어라”고 달래도 A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내가 장애인이라고 내 말은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가 “나한테 얘기해. 누가 그러더냐”고 재차 물었지만, A씨는 “아빠가 가서 뭐라고 하면 나한테 보복한다”고 소리 질렀다. 그런데 오후 9시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아버지가 들어갔더니 A씨는 농약을 마신 상태였다. 맹독성 농약으로 알려진 그라목손이 들어 있는 통이 발견됐다.

A씨는 곧바로 병원에 이송됐지만, 5월18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A씨 남동생은 원장과 동료 요양보호사 B씨를 강요와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그해 12월 혐의없음(증거 불충분)으로 종결했다. 이와 별개로 A씨 부모는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다.

하지만 모두 A씨의 ‘개인적 소인’으로 치부됐다. 공단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업무적인 요인으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의 특별한 사건(업무과다, 집단 따돌림, 직장 내 괴롭힘, 차별 등)은 확인되지 않아 고인이 직장 내에서 받은 업무상의 스트레스의 정도가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을 뚜렷하게 저하시켜 자살을 유발할 정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용노동부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 역시 “객관적 근거나 의학적 소견이 미흡하다”며 재심사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원인”

부모는 법원으로 향했다. A씨가 차별이나 동료와의 불화, 불분명한 업무분장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했으므로 업무상 재해라고 재차 주장했다. 법원 감정의도 공단 결론을 수긍했다. 지적장애 3급인 A씨는 불화 발생시 쉽게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고 보면서도 차별이나 부당한 업무지시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재판장 이정희 부장판사)는 지난달 25일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세가 악화하고 그로 인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현저히 저하돼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됐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2019년께 원장이 바뀌고 난 후부터 망인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수가 줄어드는 등 징후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망인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원장과 요양보호사들로부터 관심과 배려를 받았다고 볼 만한 사정을 찾기 어렵고, 오히려 여동생에게 한 진술과 동료 진술을 볼 때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A씨가 지적장애 3급인 점도 고려됐다. 재판부는 “망인은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요양원에서 받은 감정적 상처를 풀기 어려웠고, 일말의 항의를 하고 싶은 마음에 그라목손을 마시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망인이 자해행위를 할 당시에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고 설명했다. 본래 업무 이외의 업무를 맡게 됐을 때 받을 스트레스도 일반인보다 높았을 것으로 봤다. 실제 A씨는 설날과 연휴 기간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재판부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정한 헌법 취지를 인용한 점은 주목할 대목이다. 재판부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별 국민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통해 장애인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장애인복지법 10조)”며 “망인은 정신적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고, 이에 대한 충분한 배려나 응원이 없다면 장애인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 스스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회 여건을 조성하는 것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장애인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할 의무를 요양원이 다하지 않았다는 취지다.

법조계는 장애인 노동자를 배려해야 할 헌법상 의무를 폭넓게 인정했다는 데에 의의를 뒀다. 유족을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개인적 취약성을 업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할 때 무게를 두지 않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 태도가 재차 확인됐다”며 “업무상의 재해에 대한 신속·공정한 보상, 근로자의 복지 증진 및 근로자 보호라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해 산재보험 보장의 범위를 협소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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