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남부발전 부산빛드림본부. <한국남부발전 홈페이지 갈무리>

‘원청 갑질’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한국남부발전 하청노동자가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근로복지공단은 강압적인 업무지시와 안전수칙 미준수 등 남부발전의 지속적인 부당한 요구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고용관계상 갈등이 아닌 안전보건조치 미이행으로 인한 업무상 스트레스가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염산가스 얼굴 맞은 후 건물 옥상 투신

20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근로복지공단 부산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지난 2월14일 하청노동자 이아무개(49)씨의 골절과 적응장애, 주요 우울장애를 업무상 재해로 판정했다. 사고 이후 1년6개월이 걸렸다.

남부발전의 경상정비 분야 하청업체 한국플랜트서비스(HPS) 소속인 이씨는 입사 4년여 만인 2021년 8월21일 오전 6시50분께 부산빛드림본부 내 HPS 건물 3층 옥상에서 투신했다. 전날 오후 10시부터 야간 당직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척추와 발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씨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결정적 계기는 ‘염산가스 노출’ 사고다. 이씨는 투신 사흘 전 원청 운전원의 염산탱크 밸브 정비 요청으로 작업했다. 이 과정에서 배관의 염산가스가 얼굴로 뿜어져 나왔다. 사고는 연달아 터졌다. 염산차가 염산을 보충하는 중 라인이 터져 염산이 바닥에 뿌려졌다. 그런데도 원청 관리자는 작업허가서도 없이 이씨에게 손상된 부분을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씨는 잔류 염산을 뒤집어쓸 뻔했다.

다음날에도 원청은 안전조치 없이 작업을 지시했다. 이씨는 고온의 증기가 터져 나올 수 있는 정비 작업이라 위험하다고 알렸지만, 원청 관리자는 “살살 조립해 달라”고만 요청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가족에게 스트레스를 자주 호소했다. 이씨 아내는 “남편은 평소 원청 감독들이 작업환경은 고려하지 않은 채 결과만 만들라고 호소하는 등 부당한 업무지시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진술했다.

노사 공동조사 갑질 3건 확인, 산재 신청

남부발전의 ‘갑질’은 노사 2명씩 추천한 조사위원이 참여하는 공동 조사위원회에서 추가로 드러났다. 진상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냉각수 열교환기 공급밸브 교체작업(5월21일) △염산탱크 하역 손상부 정비작업(8월18일) △오일탱크 상부청소작업(7월30일·8월2일) 등이 갑질행위로 확인됐다. 작업절차와 안전조치의무 위반도 인정됐다. 같은해 7월에도 하청 소장이 원청 직원에게 밸브 분해조립작업을 했던 이씨가 잘못해서 그런 것마냥 “우리가 2% 부족해”라고 말하며 모멸감을 줬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지난해 8월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그는 “원청 갑질로 안전사고를 겪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해행위에 이르게 됐다”며 업무상 재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부발전측은 “발전소 내 신고제도가 스티커로 홍보돼 익명신고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승우 남부발전 사장은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안전보호 시스템이 있는데도 안전관리가 미흡했던 점이 안타깝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공단 “생명 위협으로 자해, 스트레스 원인”

공단은 원청 갑질로 인한 스트레스가 투신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질병판정위는 “원청 근로자들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업무지시가 진상조사 결과에서 상당 부분 확인됐다”며 “사고 발생 이전부터 있었던 직장내 괴롭힘 및 안전상 조치 미이행 등으로 인해 두려움과 어려움을 겪은 상태에서 사고 직전 염산가스 누출 사고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료기록에 원청 직원의 안전수칙 미준수와 부당한 작업지시로 힘들어한 것이 기록된 점도 뒷받침했다.

이씨는 현재도 하반신을 거의 쓰지 못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우울·불안·불면 등 증세가 생겨 지난해 4월부터 약물과 상담치료를 병행했다. 연평해전에 해군부사관으로 참전한 이력이 있는 이씨는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과거 직장에서 동료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다가 권고사직을 당하기도 했다.

이씨를 대리한 조애진 변호사(법무법인 시대로)는 “재해자는 원청의 위험작업 지시를 거부했으나 묵살됐고, 하청도 원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부당한 지시를 따르라고만 했다”며 “이번 사건의 산재 승인을 계기로 원청의 갑질이 근절되고 하청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노사 공동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장은 “하청노동자의 비관적 결정의 원인에는 안전보건 문제들이 합당하게 처리되지 않는 분노가 있었다”며 “안전보건상 위험 방치로 인한 업무상 스트레스가 인정된 것은 사회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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