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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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 정세는 풍전등화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정부가 최근 공개한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전략’에서는 북한 핵위협을 ‘억제’하고, 핵개발은 ‘단념’시켜, 북한이 비핵화 협상(대화)을 유도하겠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이 기조하에서는 사실상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 간 강대강 대결,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라는 격랑 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가능할까.

내년 1월18일 늦봄 문익환 목사 30주기를 맞는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돼 시민사회, 학계, 평화통일 진영이 참여하는 늦봄 30주기추진위원회(이사장 송경용 신부)를 구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에서 ‘늦봄 문익환과 6·15 의의 좌담회’를 개최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23주년을 맞이해 늦봄 30주기추진위와 함께 이번 좌담회를 준비했다.

연윤정 본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사회로 강석윤 한국노총 통일위원장(상임부위원장·61), 김은형 민주노총 통일위원장(부위원장·53), 문성근(70) 늦봄 30주기추진위원회 추진위원이 함께했다. 영화배우인 문성근 추진위원은 문익환 목사의 셋째 아들이다.

문익환 목사 30주기 앞두고 “태세 점검”

사회 : 늦봄 문익환 목사와 6·15 및 노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 단체가 모여 이번 좌담회가 추진된 이유일 것이다. 우선 각 단체 소개를 해 달라.

강석윤 : 한국노총에는 통일위원회가 상설위원회로 구성돼 있다. 상임부위원장 중 한 명이 통일위원장을 맡는다. 저는 올해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남북노동자 교류협력과 민족자주권 확보를 위한 사업, 평화통일 기반 조성을 위한 사업, 통일에 대한 인식 공유 사업, 통일단체와의 연대와 각종 정책개발을 수행한다. 산별연맹과 지역본부 산하에 통일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정기적으로 각 산하 통일위원장이 모여 회의를 한다.

김은형 : 민주노총은 출범과 함께 통일운동을 노동자 주도로 하자고 했다. 통일위원회는 민주노총 상설위원회 중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곳이다. 산별연맹과 지역본부 산하에 통일위원회가 있다.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노동분과에서 남북노동자 교류사업을 양대 노총이 함께하고 있다. 통일연대단체들과도 함께 사업한다. 최근 통일위 회의에서는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문제는 민족문제 일환인 만큼 통일위가 앞장서자고 했다.

문성근 : 문익환 목사가 내년 1월18일 세상을 떠난 지 30년 된다. 윤석열 정부 들어오면서 민주진영이 전반적으로 혼란스럽다. 문 목사 30주기를 맞아 문 목사 삶의 현재적 의미를 점검하고, 우리 태세를 점검하자는 취지로 늦봄 30주기추진위가 추진됐다. 단순히 추도식으로 끝낼 게 아니라 다양한 심포지엄·문화행사·평화선언 등을 끌고 가자며 각 분야별로 기획을 만들고 있다. 그중 하나가 양대 노총 통일위원회와의 좌담회를 제안드리게 됐다.

“문익환,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회 : 문익환 목사는 58세인 1976년 3월1일 민주구국선언 발표로 첫 구속된 뒤 1994년 1월18일 돌아가실 때까지 17년 중 11년 반을 옥살이했다. 70~80년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역사의 고비마다 물러서지 않고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 됐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가 문익환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김은형 : 맨 처음 얼굴을 봤을 때 기억은 곱슬머리 흰머리에 개량 한복인가 두루마기인가를 입으시고 쩌렁쩌렁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선구자 이미지였다. 90년대 경남대에서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통일은 됐다’면서 힘차게 강연을 하셨다. 그때 정말 통일이 될 줄 알았다. 당시 어린 나이에 멋져 보였다. 민주화운동 어르신으로 기억한다.

강석윤 : 언론에 나온 것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60년대생인) 저희 세대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으로 활동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특히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오열하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통일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불의에 항거하고 저항하는 모습도 그렇다.

문성근 : 가족의 입장에서 1976년 구속 때 걱정을 했다. 감당하실 수 있을까. 굉장히 안 좋은 시대였고 그때까지 8년간 구약성서 번역을 했던지라 살이 찌고 운동을 안 한 상태였다. 하지만 너무 잘 감당했고, 이후 여섯 번 더 수감되셨다. 저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는 궁금했고 믿어지지 않았다. 김형수 시인이 쓴 <문익환 평전>과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그제야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북간도 명동촌 출신이다. 윤동주·장준하가 그의 어릴 적 친구다. 1970년 전태일 분신, 1980년 오월 광주까지 그 모든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문익환을 만들었다.

“윤동주, 장준하의 죽음은 친구의 죽음이잖나. 전태일 분신도 엄청 영향을 미쳤다. 70년대와는 달리 80년 광주 이후는 리얼리즘이다. 포화 속에서 죽었으니. 우리 배우들끼리는 ‘인물에 올라탄다’고들 말한다. 문 목사는 민중의 삶에 올라탄 것 같이 일체화해서 살았던 것이 그렇게 힘을 유지했던 게 아닐까 싶다. 변화를 수용한 거다. 특히 광주 이후부터는 미국 군산복합체가 우리 역사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전태일 열사여” 문익환 삶의 변곡점

“전태일 열사여(1번째) … 박영진 열사여(13번째, 노동운동가) … 이한열 열사여(26번째)”

문익환 목사가 1987년 7월 출소 다음날 이한열 열사 장례식장에서 조사 대신 26명의 민주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 내용이다. 시인이기도 했던 문 목사는 전태일 열사 분신 소식을 듣고 시 <전태일>을 지었고, 전태일을 “민중해방운동의 선구자” “전태일이야말로 예수였다”고 평가했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전태일이 문 목사 삶의 변곡점이 됐다는 평가가 있다. 문익환 목사와 노동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사회 : 저도 이번 좌담회를 준비하며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다. 문성근 추진위원 말씀처럼 문익환은 전태일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후에도 수없이 많이 언급했다. 노동자에게 문익환은 어떤 의미인가.

김은형 : ‘문익환과 노동’의 관계를 보고 놀랐다. 그가 통일운동을 했던 것은 민족에 대한 사랑,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것은 민중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민중 중에서도 가장 아픈 민중이라면 그 시대에는 노동자·농민이었다. 전태일을 그렇게 가슴 아파하고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면, 누구보다 노동자들과 함께하셨을 것 같다.

강석윤 : 전태일 열사의 희생이 노동운동 싹을 틔웠다면, 노동운동을 성장시키고 이끌어 온 분들은 헌신적 지지와 연대를 보내준 사회운동가들이다. 그 핵심에 문익환 목사가 계시다. 오늘의 노동운동 현실은 힘들고 외롭지만 좌절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전태일 열사와 문익환 목사를 포함한 사회운동가들의 지지와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문성근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문익환 목사가 가장 먼저 만들자고 했다. 어느날 제게 전태일 영화를 만들어야겠는데 어떻게 할까, 말씀하셨다. 영화배우였던 저는 난감했다. 돈이 얼만데. 영화사나 대기업은 절대 투자 안 할 텐데. 시민모금으로 해야 가능하다고 봤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영화가 완성된 건 돌아가신 뒤라 (문 목사는) 못 보셨지만 영화 마지막에 돈 낸 분들 자막이 올라간다. 4분 넘게 올라갔다. 세계영화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해외영화제에서는 사람들이 경악했다. 2~3분 넘어가니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문 추진위원은 또 하나의 증언을 했다.

“문익환 목사가 사회운동에 참여한 계기가 장준하의 죽음이라고 하지만 이소선 어머니께서 아니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니냐, 전태일 때문이야.’ 분신 당시 문 목사가 구약성서 번역을 한창 하던 때인데, 번역을 놓을 수 없으니 청계천(청계피복노조)을 늘 찾아가 격려하고 밥 사주시고 돈 놓고 가시고 계속 그러셨다는 거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민간 통일운동 불 댕긴 ‘문익환 방북’

문익환 목사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면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수감된 사건이다. 그의 행동은 민간 차원 통일운동의 불을 댕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문익환은 “진정한 민주주의 완성은 통일이다” “통일을 위해 증오와 대립보다 대화와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 방북 당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과의 합의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포함되는 등 냉전 붕괴 이후 남북협력 방안의 기초가 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방북 이후 문익환 목사 삶의 궤적 의미는.

김은형 : 목사님 다녀오시고 노래가 나왔다. “버려진 사선 철길을 따라/ 민중의 가슴 차표를 쥐고/ 그대 오르네 철책 면류관 쓰고/ 저 언덕을 오르네/ (후략)” <그대 오르는 언덕>의 이 노래가 문 목사를 상징하는 것 같다. 통일의 큰 상징이었고 온몸으로 남북교류를 뚫어냈다. 최근 답답하고 암울한 남북관계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통째로 거꾸러뜨리는 상황에서, 그 시절 죽음의 사선을 넘는 그 누군가, 어둠을 찢는 한 줄기 빛을 보여준 선구자들이 기억난다.

강석윤 : 통일을 빼놓고 말씀할 수 없는 분이다. “통일은 됐어”라고 하신 말씀이 있잖나. 문 목사님 관련한 책을 봤는데, ‘분단 이데올로기가 만든 우리 마음을 스스로 허물 때, 우리 스스로가 통일은 반드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 가까운 미래의 길로 이식하고 실천할 때, 그때 반드시 통일이 된다, 절망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기초가 돼 민간에서의 통일운동이 본격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성근 : 김형수 시인의 <문익환 평전>에서는 방북 사건을 남북해외 동포들의 민심을 동시에 흔들어 버린 민간인이 도모한 해방 후 최대사건, 그렇게 개념을 정리하더라. 89년 사건의 핵심은 민의 통일의지다. 문익환 목사가 휴전협정 당시 통역을 담당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 신학 유학을 갔을 때 한국전쟁이 났다. 유엔이 당시 미국 유학 중인 한국인을 도쿄에 모아 한반도로 가기 전 미군들에게 간단한 우리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휴전협정까지 통역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의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말씀하셨다. 2자니, 3자니, 4자니, 4.5자니, 의자를 몇 개 놓느니. (89년 방북시) 문 목사는 민간인으로서 눈을 보면서 가슴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겠다, 상황을 점검해 보자고 했다. 미래 통일이라는 면에서 김일성 주석과 10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했다. 연방제 전 국가연합 단계와 경제문화교류 확대 등 민 중심의 사고가 결정적 합의를 이뤘고 축약돼서 옮겨온 게 6·15 남북공동선언이었다.

방북은 왜 1989년이었을까. 문 추진위원은 “문 목사는 국제정세가 격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제대로 못 하면 20세기 초 나라 잃을 때와 비슷해질 수 있다”며 “빨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1989년은 냉전질서가 흔들리던 때다. 동독과 동구권이 무너지더니 1991년 마침내 소련이 해체됐다.

“문 목사 생각은 분단을 강제한 동서냉전이 흔들리고 있다. 동서냉전이 깨지면 우리가 분단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곧 깨질 것이 내다보이니 우리가 어떻게 가까워질 것인지 상황을 점검해 보자. 고려연방제는 안 되니까. 그래서 방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흐름을 보면 아쉬운 게 너무 많다. 1989년부터 (시진핑 중국 주석이 집권한) 2013년 이전까지가 우리 민족의 절대호기였는데, 그 기간을 흘려보내 우리는 점점 어려운 국면으로 가는 게 아닌가. 20세기 초와 같은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말씀에 당시엔 동의가 안 됐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을 보니 그 걱정이 지나친 게 아닌 것 같다.”

무겁게 맞은 6·15 남북공동선언 23주년

2000년 6월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분단 사상 처음 남북정상이 만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통일 실현 의의에 뜻을 같이하며 5개항에 합의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 간에는 장관급회담과 경제회담, 철도·도로 연결과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화와 교류협력이 확대됐다. 6·15 공동선언은 실제 남북관계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통일의 이정표’라고 불린다. 6·15 공동선언은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10·4 남북공동선언,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4·27 판문점선언, 9·19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그 정신이 계승됐다.

좌담회가 열린 날은 꼭 6·15 공동선언 23주년인 날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후 11년 만의 성과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기념하는 어떤 행사나 메시지도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기도 포천 승진훈련장에서 연합·합동 화력격멸훈련을 주관했다. 북한의 도발 시나리오를 적용한 대규모 실기동·실사격 훈련이다. 윤 대통령은 “적의 선의에 의존하는 가짜 평화가 아닌 우리 힘으로 국가안보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말했다.

사회 : 6·15 공동선언 23주년을 맞는 오늘의 의미는.

김은형 : 참 무겁다. 올해부터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가고 있다. 검찰을 등에 업고 독재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통째로 쥐고 민중을 짓밟겠다는 것이고, 미국과 결탁해 이 민족을 어디까지 끌고 갈까. 요즘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2018년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당시 전 세계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고 눈물을 흘렸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냉전 분단국가가 비로소 새 역사의 장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빠르게 허물어질 줄이야. 왜 우리가 2018년을 놓쳤던가. 정치권력에 맡겨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중이 강력한 통일의지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자주와 대단결 원칙에서 풀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강석윤 : 6·15 공동선언은 무엇보다 통일의 청사진을 담은 합의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두 정상이 만나 양쪽 통일방안의 공통점을 찾아 그에 기초해 단일한 통일방안을 합의해 낸 것이지 않나. 이후 10·4 선언, 4·27 선언, 9·19 선언은 이에 기초해 나왔다. 하지만 이후 어떻게 됐나. 합의한 것을 실천했으면 지금의 상황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다. 특히 윤석열 정권 들어 앞으로 이런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까,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상당한 의문을 심각하게 가지고 있다.

문성근 : 6·15 공동선언은 분단 이후 남북정상 교섭이란 최대 사건이다. 이후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이 노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 그 부분에서 아쉽다는 분들이 많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그런 측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정치는 시민이 깨어나서 조직화한 딱 그만큼만 발전한다고 했다. 사실 딱 그만큼도 아니고 3분의 1 정도인 것 같다. 미국에 대한 정신적 의존을 털지 않으면 대책이 없다. 국민여론이 받쳐주질 않는다. 문 목사가 민주는 민중의 부활, 통일은 민족의 부활인데, 이는 자주 없이 성취할 수 없다고 했다. 자주라는 말이 요즘같이 절실할 때가 없다.

▲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꽉 막힌 남북, 노동자 교류도 ‘난관’

사회 :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 실현은 비단 정부만의 몫은 아니다. 남북은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각 정당과 단체, 인사들을 폭넓게 망라하는 상설적인 통일운동연대조직인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와 남·북측위원회를 발족하고 다양한 부문별 활동을 전개했다. 노동자 역시 남북교류를 지속해 왔다. 양대 노총 통일위원회 중심으로 6·15 공동선언 실천과 통일을 위해 어떤 활동을 전개했나.

김은형 : 양대 노총과 북한 직총 3자가 남북노동자가 함께할 수 있는 사업을 했다. 5·1절 금강산 남북노동자대회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시기엔 남북노동자축구대회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중반부터 북한과의 교류가 다 막혀 지난해에는 남북이 8·15 노동자대회 연대사와 결의문을 주고받았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절차를 밟고 연대사와 결의문을 주고받았는데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 현재는 남북 간 모든 게 차단돼 어떤 행사도 같이하지 못하고 있다.

강석윤 : 남북이 함께하기 위해 국보법을 살펴봐야 하고, 감옥 갈까 걱정하며 통일·교류를 해야 한다는 현실이 참 불행하다. 교류 자체가 전면 막혀 있는 상황이다. 북한과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마땅치가 않다.

김은형 : 그럼에도 통일위원회는 계속 시도해야 한다. 우리 노동자는 남북교류를 할 수 있도록 끌어내야 한다. 후쿠시마 핵 오염수 문제는 한반도 전체 민족과 민중의 문제다. 이를 둘러싸고 무엇을 같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윤 정부에선 민족통일·민주주의가 없다”

사회 : 윤석열 정부 들어 남북 간 강대강 대결,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라는 격랑 속에서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도 위기에 놓였다. 정부의 ‘노조 때리기’로 한국노총 금속노련 사무처장을 유혈진압하고 집회·시위 자유도 위협받고 있다. 문익환 목사를 구속했던 국보법은 지금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문 목사가 헌신했던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김은형 : 먼저 남북교류협력법을 정상화해야 한다. 예컨대 일본에 가서 재일동포, 우리학교 등 방문건에 대해 너무 무질서하고 방만하게 이 법이 적용된다. 민간이 만나고 교류하는 것은 새로운 통일의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지 않나. 하지만 이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열리지 않는다. 윤석열 정권 들어 한반도 노동자·민중의 삶은 파탄나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 정권 아래에서는 민족통일도, 민주주의, 노동자·민중, 한국경제 미래도 없다. 민주노총은 반노동·반민주·반평화 윤석열 정권 폭주를 막고 심판·퇴진 투쟁으로 돌파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강석윤 : 지금까지 북한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검증됐음에도 지금 정부는 강경하게 진행 중이다. 정부의 기조가 그럴수록 민간의 교류를 활성화해야 하는데 민간까지도 막아 버리니 암담하다. 그럼에도 이런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교류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머리를 맞대고 찾아가야 한다. 한국노총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부와 대화의 끈을 이어 가려고 했지만 최근 광양 사태에서 보면 그런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더 이상 대화는 불가능하고 투쟁 기조로 갈 수밖에 없다. 한국노총은 윤석열 정권 심판 투쟁 방향을 잡고 있다.

문성근 : 양대 노총을 응원한다. 남북관계는 한미일과 북중러 대결구도로 가고 있다. 국가 전체 외교노선에 관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중 선전전이 필요하다. 그 다음, 젊은 세대가 통일이 싫다고 하는 중요한 요소가 통일비용론이다. 통일비용론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충분히 많이 알려야 한다. 독일식으로 갑자기 정부를 통합해 버리면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

하지만 유럽이 석탄·철강 등 공동시장에 이어 화폐통합까지 50년이 걸렸다. 우리도 그 정도 기간이 걸려서 충분히 접점을 넓히는 긴 과정의 통일이지, 독일처럼 느닷없는 되는 것만이 통일이 아니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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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70년, 조합원과 평화통일로”

사회 : 올해 7월27일 정전협정 70년을 맞는다. 1989년 문익환 목사는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한 첫 마디는 “우리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였다. 그 소원은 이뤄지지 못하고 지금까지 흘러왔다. 곧 8·15가 다가온다. 앞으로 계획은.

강석윤 : 정전협정이 70년 가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한국노총은 평화협력 중심으로 정전협정 폐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공동실천에 함께하려고 한다. 통일의 달 8월이 다가온다. 한국노총은 통일선봉대를 통해 현장 조합원과 평화통일 실천계획을 진행할 것이다. 윤석열 정권 심판 투쟁 선봉대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갈 것이다.

김은형 : 오늘 감동적인 자리였다. 눈물도 좀 났다. 과연 운동이란 무엇인가. 통일운동, 민주운동 등 운동은 신념이 명확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문 목사처럼) 민중을 믿고 통일을 열어가고자 한다면 그 돌파구는 민중이 다시 열 것이다. 민주노총은 지역 노동자·학생 등을 포함 지역 통일선봉대를 하고, 8·15 노동자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11월 민주노총 총궐기까지 가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다.

문성근 : 최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도회 성명서 맨 앞 부분에서는 문익환 목사의 말을 올렸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우리 공동체, 사회공동체·국가공동체·민족공동체를 사랑하면 좋겠다. 늦봄 30주기추진위는 9월 말까지 단체와 개인의 참여를 통해 10월 정식 발족하려고 한다. 양대 노총도 참여를 부탁한다.

정리=연윤정·임세웅 기자
사진=정기훈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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