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한국와이퍼가 지난해 말 청산 개시 직전 증자한 1천120억원 중 약 30%에 달하는 310억원을 덴소코리아에 손해배상 명목으로 지급하기로 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위로금 지급에 쓰일 것으로 알려진 증자금액에 대한 구체적인 용처가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한국와이퍼는 세계 2위 자동차 부품업체인 일본 기업 덴소가 100% 출자(현재 지분율 38%)해서 1987년 설립한 회사다. 덴소는 한국계열사인 덴소코리아(한국사업부 총괄·와이퍼부문 영업권)와 덴소와이퍼시스템(와이퍼부문 생산·납품)을 운영하면서 한국와이퍼에서 만든 와이퍼를 현대자동차·기아에 납품해 왔다.

한국와이퍼 청산 결정이나 생산중지 명령을 내린 주체가 모두 덴소코리아라는 점에서 ‘셀프 배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법인 청산을 이유로 200여명은 일자리를 잃게 된 상황에서 증자금액의 30%가량을 덴소코리아에 몰아주는 것 또한 먹튀 논란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5자 간담회’서 증자금액 구체적 용처 처음 밝혀
“310억원 덴소코리아에 배상해야”

6일 <매일노동뉴스>가 입수한 녹취록에 따르면 지난 4월12일 금속노조와 한국와이퍼 주주인 덴소와이퍼, 덴소코리아, 한국와이퍼 노사가 모인 자리에서 덴소코리아측은 한국와이퍼가 증자한 1천120억원 중 310억원을 덴소코리아에 ‘공급의무면제비용’으로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국와이퍼는 올해 1월8일 청산 개시를 앞두고 지난해 12월29일 1천120억원(자본금 50억원 포함해 1천170억원)을 증자한 바 있다. ‘5자 간담회’는 한국와이퍼 청산에 따른 고용문제 해결을 위해 고용노동부 안산지청 중재로 마련됐다.

덴소코리아 관계자는 이 자리에서 공급의무면제비용에 대해 “덴소코리아에 대한 채무 금액”이라며 “한국와이퍼와 덴소코리아 사이에서는 공급이 중단될 경우 손해비용을 배상하도록 돼 있다”고 밝혔다. 한국와이퍼 관계자도 이 비용에 대해 “덴소코리아가 가져간다”고 설명했다. 한국와이퍼가 와이퍼 부품을 생산·조립해 덴소코리아에 공급하면 덴소코리아가 현대자동차·기아에 납품하는 구조인데, ‘고객사’에 부품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책임을 한국와이퍼에 묻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와이퍼 사업 철수 결정을 내린 것도, 생산중지 명령을 한 것도 덴소코리아라는 점이다. 한국와이퍼는 지난해 7월 청산계획을 밝히면서 “DNKR(덴소코리아)은 한국 와이퍼 사업 철수로 방향성을 정했고, 주주인 DNWS(덴소와이퍼시스템)는 당사(한국와이퍼)의 청산을 결정했다”고 공지했다. 지난해 8월31일 한국와이퍼 영업담당자가 생산관리부서에 보낸 메일을 보면 DNKR 요구사항으로 “현대차·기아의 국내공장으로 납입하는 품번제품(에 대해) 한국와이퍼에서 생산(을) 중지(한다)”라며 “생산 및 납품 관련 담당께서는 가능하면 금일부터 첨부 생산 및 납품을 중지바랍니다”고 밝혔다. 최윤미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장은 “당시 생산중지된 물량은 전체 물량의 70~80%였다”며 “충분히 납품할 수 있는 상황에서 덴소코리아가 먼저 생산중지를 결정한 것인 만큼 공급의무면제비용은 셀프배상”이라고 지적했다.

한 해 매출보다 더 많은 금액 배상하라?
“사회적 책임지려면 고용기금에 출연해야”

‘먹튀’ 논란도 피하기 어렵다. 5자 간담회에서도 310억원이라는 금액이 어떻게 산정된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는 한국와이퍼 지난해 매출보다도 많은 금액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국와이퍼 매출액(2021년 4월~2022년 3월)은 275억9천만원 수준이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 및 덴소 관련 회사가 소재한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확인한 결과 덴소 한국 관계사가 2005년부터 2022년까지 외국인투자 촉진법(외국인투자법) 및 지자체별 조례에 근거해 지원받은 혜택은 확인된 금액만 220억원이었다. 덴소가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외국기업으로 수백억원 혜택을 받고선 청산 이후에도 이에 준하는 금액을 ‘배상’ 명목으로 가져가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분회는 공급의무면제비용으로 셀프배상을 할 게 아니라,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고용기금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 조합원에 대한 직접고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노사가 맺은 고용안정협약을 이행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라는 것이다. 스웨덴 고용안정기금(TSL·Trygghetsfonden) 사례를 참고했다. TSL은 정부 기구가 아니라 단협에 의해 고용주가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기금으로 운영된다. 생산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구직 상담, 일자리 중개·알선, 교육훈련 서비스를 제공한다(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 ‘스웨덴 비정부 고용안정기금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TSL의 실험을 중심으로’). 분회는 이러한 방안을 ‘5자 간담회’ 이후 교섭에서 제시했지만 사측은 난색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장석우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한국와이퍼 청산으로 덴소코리아와의 납품계약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고의나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 한국와이퍼에 귀책사유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떤 명목으로 증자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항목에 돈을 써야 할 법적 근거는 없다”며 “납품의무 위반에 대해서도 면제 약정을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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