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불법행위 처벌, 노조의 불공정 채용 단속, 직무·성과중심 임금체계 개편. 윤석열 정부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명목으로 밀어붙이는 정책들이다. 그런데 노동시장 격차 완화를 위해 오래전부터 제시된 정책이 있다. 국내외적으로 검증됐지만 정부와 자본이 외면해 왔다. 산별교섭 활성화와 단협효력 확장이다. 이런 정책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시행해야 하는지 4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단체교섭이 개별 기업 수준이 아니라 산업·업종 수준에서 조정되고 집중될수록 노동시장의 불평등도가 낮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ILO(국제노동기구)는 물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나 IMF(국제통화기금)가 발간한 보고서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저임금·취약계층의 보호를 위해 정부가 재정적 지원정책을 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체교섭 활성화로 임금과 노동조건의 보편적인 규범을 형성하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영국에서는 노사관계에 대한 법과 정부의 개입이 약했던 자율주의(voluntarism) 전통하에서도 정부가 단체교섭 활성화를 지원했다. 1909년 제정된 임금위원회법에 근거한 임금위원회(Wage Council)는 자율적인 단체교섭이 이뤄지지 않는 미조직·저임금 노동자들이 다수 종사하는 업종을 대상으로 정부가 설치한 기구다. 각 위원회는 동수의 해당 업종 노·사 대표와 3명의 독립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독립위원들은 노·사 간 이견이 조정되지 않은 경우에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단체교섭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했다. 임금, 노동시간, 휴일, 주택공제 등과 같은 의제를 주로 다뤘고, 체결된 협약은 법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아 해당 업종에 일괄 적용했다. 덕분에 1975년 단체협약 적용률은 85%에 이르렀다. 당시 노조 조직률(43.8%)의 약 2배다. 하지만 1979년 대처 정부 집권 이후 이 임금위원회는 단계적으로 폐지됐다. 2021년 말 현재 단체협약 적용률은 노조 조직률(23.1%)과 거의 유사한 26% 수준으로 떨어졌다. 영국이 현재 유럽 내에서 가장 불평등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라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최근 논의는 산업·업종별 교섭 활성화만이 아니라 ‘단체협약 효력확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만인효(erga omnes·단체교섭에 참여한 사용자단체 회원사의 모든 노동자에게 해당 협약을 적용하는 것)를 넘어 효력확장(extension·해당 협약을 체결한 사용자단체의 비회원사 노동자들에게도 해당 협약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효력확장 제도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포함해 OECD 회원국의 3분의 2가 이미 시행하고 있다. 하청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단시간·단기간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기존 사회적 보호에서 배제되는 노동자가 갈수록 증가하는 현실에서 이 제도를 더욱 활성화해 단체협약을 통한 보호 범위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협약 체결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도 해당 협약을 적용하자는 주장은 그 협약의 ‘공적 규범’ 지위에 근거한다. 단체협약은 노조와 사용자단체라는 사적 이해관계자들이 마련한 규범이지만, 그 이해관계자들이 충분히 대표성을 갖고 있다면 그 협약이 법과 같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가 그러한 법적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추세가 이럴진대 한국에서의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 정부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를 강조한다. 그 방안으로 노동시간 관련 제도나 임금체계 개편과 같은 개별적 근로관계 의제를 제시할 뿐 단체교섭 구조 개편에 대해서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정부는 ‘노사 법치주의’를 강조하는데 정부 스스로가 이행해야 할 법적 의무에는 침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먼저 살펴야 한다. 우리 법에서는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근로기준법 4조)라고 명시하고 있다. 근로조건이 사용자 ‘일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용자 힘의 우위가 아닌 ‘동등한 지위’에서 강압이 아닌 ‘자유의사’에 따라 정한다는 ‘근로조건 대등 결정의 원칙’을 법으로 못 박고 있다. 또한 우리 법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기업·산업·지역별 교섭 등 다양한 교섭방식을 노동관계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에 따른 단체교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30조3항)고 명시했다. 다양한 교섭방식 선택 지원 및 교섭 활성화를 위한 국가의 노력의무를 법으로 정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노력’ 의무이기 때문에 실효성이 낮다고 지적하지만 노력 ‘의무’도 엄연히 법적 의무다. 노사관계는 정부의 법질서 기준에 기반해 노사 자치로 형성하는 질서가 상호작용하는 관계다. 노와 사만으로 구성되는 이항관계가 아니라 노사 자치 영역에 대한 제 3자 보증인으로서 정부는 노사관계의 주요 행위자로 포섭된다. 따라서 정부는 노·사 간 교섭력 대등성 확보와 자율교섭을 위한 보증인으로서 의무를 행하는 한편 산별교섭과 같은 다양한 방식의 단체교섭이 활성화되도록 법적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침묵하는 법을 말하게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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