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2021년 12월1일 전국 해안과 산지에 강풍특보가 발효됐다. 이미 하루 전날 매서운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응우옌 반 탕(45·사진)씨도 전날 강풍에 싸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베트남에 있는 아내·아들과 영상통화 중 “내일 하루 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일을 쉬는 것은 반 탕씨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출근하라”는 물량팀장의 전화가 계속되자,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다잡고 일터인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국가산업단지 안 세방부두로 나섰다. 그날 결국 사달이 났다. 함께 일하던 동료를 잃었고, 반 탕씨는 목발 없이 걷기 힘든 몸이 됐다. 한국에서 돈을 모아 베트남에 있는 식구를 먹여 살리겠다는 반 탕씨의 소박한 꿈은 그렇게 무너졌다.

“강풍에도 무리한 작업,
노동자 1명 사망, 1명 중상”

반 탕씨는 2017년 7월9일 단기 관광비자로 한국을 찾았다. 실은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그때부터 탕씨의 떠돌이 한국 생활이 시작됐다. 첫 일터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복숭아 농장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일당 7만원을 받았다. 새벽 5시께 집에서 나와 버스에 실려 한참을 이동해야 농장에 도착했다. 잠만 자고 나와 일하고 다시 돌아가는 고된 생활이었다고 한다.

1년여 뒤 친구 소개로 더 많은 임금을 준다는 조선 기자재 업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용접 한 번 해 본 적 없었던 탕씨의 교재는 동료였고, 곁눈질과 보디랭귀지로 기술을 습득했다. 일당은 14만원으로 올랐다.

2021년 12월1일 그날. 지난 15일 오후 전남 목포에서 만난 반 탕씨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 입국을 주선한 브로커에게 주려고 진 빚 3천만원을 겨우 다 갚고 이제 돈 좀 벌겠다 싶었던 시기였다. 하늘이 무심했다. 그날 강풍에 라싱브리지(Lashing Bridge)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는 크레인 기사가 철수했는데도, 물량팀장은 무리하게 작업을 이어 가다  거대한 구조물이 그대로 넘어졌다. 라싱브리지는 컨테이너를 적재하기 위해 선박 안에 설치하는 구조물이다.

라싱브리지 상단에서 용접 전 작업을 하던 반 탕씨는 사고로 오른쪽 상완골(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뼈)과 골반뼈, 종골(발뒤꿈치에 위치한 뼈)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반 탕씨와 함께 있던 한국인 동료 물량팀장은 목숨을 잃었다.

▲ 2021년 12월1일 전남 영암군 삼호읍 세방부두에서 강풍에 라싱브릿지가 전도돼 업무중이던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남노동권익센터>
▲ 2021년 12월1일 전남 영암군 삼호읍 세방부두에서 강풍에 라싱브릿지가 전도돼 업무중이던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남노동권익센터>

“일하면서 계약서 써 본 적 없어”

예견된 사고였다. 반 탕씨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안전교육은 물론 작업 방식에 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작업을 하기에는 위험한 날씨였고, 반 탕씨도 이를 감으로 알았지만 물량팀장이 시키는 대로 일해 왔던 그는 그날 출근 독촉을 뿌리치지 못했다.

“(사고 당일 라싱브리지에) 올라가는데 좀 위험하다고 느껴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밑에 있는 동료(물량팀장)가 ‘괜찮다’며 계속 올라가 일하라고 한 거예요. 그런 뒤 5분 만에 사고가 났죠.”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 37조에는 “사업주는 비·눈·바람 또는 그 밖의 기상상태의 불안정으로 인해 근로자가 위험해질 우려가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조선업 다단계 하도급구조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당장 예방조치를 해야 할 사업주가 누군지조차 몰랐다.

사장이 누구인지 묻자 반 탕씨는 “모른다”고 했다. 미등록 체류상태인 반 탕씨는 근로계약서를 써 본 적이 없다. 물량팀장이 일당을 14만원씩 쳐주기로 했고, 그 말을 믿고 일할 뿐이다.

최민수 금속노조 전남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은 “조선업 현장에서는 대불산단을 ‘난장(亂場)’이라고 부른다”며 “기본이 3차고 운 나쁘면 4차 (물량팀) 소속”이라고 설명했다. 반 탕씨는 4차 물량팀 소속으로 추정된다.

대불산단에 공장을 가진 1차 하청업체가 삼성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 같은 원청에서 업무를 도급받으면, 2차 하청업체에 공장 임대료나 이윤 등을 제한 뒤 업무를 재하도급하고, 2차 하청업체는 실제로 업무를 수행할 물량팀들(3차)에게 업무를 맡기는 식이다. 이후 3차 물량팀은 다시 물량을 다른 물량팀장(4차)에게 배분한다. 물량팀장이 사업자등록을 하기는 하지만, 회사 실체는 없다. 실제 사장이 민·형사상 송사에 얽혀 있거나, 임금체불 등 법적인 문제로 사업자등록을 하기 어려우면 직원에게 사업자등록을 하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류인근 노조 광주전남지부 정책부장은 “(물량팀장이) 사업자등록이 돼 있어도 어차피 다 노동자니, 팀장이나 반장으로 부른다”고 설명했다. 문제가 발생할 때 누가 책임자인지 알 수 없는 구조라는 뜻이다.

“다단계 하도급에 모호한 사업주
노동자 안전은 불안”

분명한 사실은 반 탕씨가 만든 라싱브리지는 삼성중공업 선박에 들어간다는 것, 라싱브리지 제작업무는 삼성중공업에서 도급을 받은 조선소 기자재업체가 해당 물량을 재하도급했다는 것이다. 이런 다단계 하도급구조는 지금도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을 수많은 ‘반 탕’씨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최 부지회장은 “최대한 싸게 해야 하니 대불산단에서는 대형 조선소는 사용하지 않는 소모 자재를 쓴다”며 “심지어 물량팀 같은 경우는 (소모품 대신) 돈으로 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는 “돈으로 주면 더 아낄 수밖에 없다”며 “예를 들어 안전화도 4만원 주고 살 것을 3만5천원짜리 사고, ‘3M’ 방진마스크 사는 대신 더 질 떨어지는 것을 사게 된다”고 설명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반 탕씨는 사고 후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반 탕씨가 중상을 입는 대형사고라 경찰과 119가 출동했고, 사고를 은폐할 사업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류인근 정책부장은 “사고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뒤 반 탕씨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갔고, 알아보니 사고난 상황이 명확해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 산재신청 접수가 됐다고 했다”며 “그런데 사업주가 누구인지 확인이 안 돼 보류시켜 놓은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이후 근로복지공단은 사업자등록 후 ‘물량팀장’으로 불리며 일한 숨진 동료를 사업주로 보고 산재를 승인했다.

우리나라는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미등록 체류자여도 업무 중 재해를 입은 경우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다. 산재가 인정되면 미등록 체류자는 임시로 G-1(기타) 비자를 발급받는다. G-1 비자는 산재를 당해 치료 중이거나 민·형사상 소송 중인 자, 난민 등에게 발급하는 비자다.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사고 전 몸 되찾기 힘들어
베트남으로 돌아가도 앞날 캄캄”

반 탕씨의 요양기간은 지난해 12월로 끝난 상태다. 이후 병원비 지원이 없다 보니 그는 아파도 병원을 방문하지 못한다. 상황은 좋지 않다.

그는 “오른쪽 골반이 다쳐 다리 힘을 60% 정도밖에 못 쓴다”며 “지지대가 없거나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걷기 힘들고, 걸을 때 통증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조에 따르면 의료진은 반 탕씨가 사고 전 상태로 100% 회복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추후상병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지만, 반 탕씨가 베트남으로 돌아간 뒤에는 추가상병이 발생해도 이를 적절히 보상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장해등급 판정 신청을 준비 중이다.

“가장인데, 이렇게 돼서 너무 힘들어요. 베트남에 돌아가서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요.”

자신의 상황을 담담히 전하던 그는 아들과 아내, 가족들 이야기를 할 때 결국 눈물을 흘렸다. 산재가 인정돼 요양급여를 받았지만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일을 하지 못하는 반 탕씨는 여동생의 도움으로 월세 30만원을 겨우 낸다.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길 리 만무하다. 동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그는 “한국에 오기 위해 서류를 준비해 준 사람(브로커)에게 돈을 많이 줬다”며 “여기 와서 열심히 일해 겨우 다 갚았는데 사고가 나 이렇게 된 상황”이라며 속상해했다. 일하며 힘들었던 적은 없었냐는 질문에 “힘든 건 생각 안 하고 일했다”며 “한국에 (큰돈을 주고) 왔으니 돈을 갚아야 했고, 돈만 벌 수 있으면 (힘든 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반 탕씨는 가족이 있는 베트남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베트남에서 무엇을 하며 먹고살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고국에는 아내와 올해로 여섯 살, 열다섯 살 된 아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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