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9 이태원 참사 유족이 지난 16일 오후 시민추모제에서 연단에 올라 희생자 자녀에게 직접 쓴 편지를 읽고 있다. <홍준표 기자>

“친구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압사당해 많은 청춘이 ‘고인’이라는 명칭을 다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과 정부는) 진짜 사과가 무엇인지 몰라서 나오지도 않고 모른 체 하고 있습니까. (중략)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빨리 장례비를 신청하라며 독촉하더니 우리 아이들의 영정사진이 들어간 합동분향소가 이제야 차려지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자행되는 상황에 할 말을 잃고 참담함을 느낍니다. 이런 상황에도 그날의 일을 일반 사고라고 할 것인가요. 우리 아이들을 두 번 죽이지 마십시오.”

10·29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고 김용건씨의 어머니는 참사 현장인 이태원에서 자필 편지를 읽으며 오열했다. 편지를 든 두 손은 떨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는 “정치를 모르지만 청춘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씌워진 오명을 벗겨야 한다”며 용기를 내 연단에 섰다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니” 애끓는 사연 가득

참사 49일째인 지난 16일 유족들이 다시 모였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이날 오후 6시 이태원역 인근 도로에서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시민추모제를 열었다. 희생자 친인척과 지인 등 300명이 참석했다. 영하 10도 안팎의 살을 에는 강추위에도 8천여명(주최측 추산)의 시민이 추모에 동참했다.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과 세월호 유가족도 함께했다.

추모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든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녹사평역 3번 출구 근처 이태원광장에 지난 14일 차려진 ‘합동분향소’에 헌화 행렬이 계속됐다. 유족들도 참배와 헌화를 마친 뒤 추모제에 참여했다. 4개 종단(불교·개신교·천주교·원불교)의 종교의식을 시작으로 최초 신고접수 시각인 오후 6시34분이 되자 참여자들은 묵념했다.

추모 영상이 재생되자 현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유족들 동의 아래 희생자들의 이름과 사진이 이날 처음 공개됐다. 희생자의 이름이 화면에 뜰 때마다 희생자 가족의 통곡이 터져 나왔다. 일부 유족은 자녀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다가 실신 직전에 놓여 관계자들이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다.

김혜진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가 화면에 희생자 사진이 뜰 때마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르자 시민들은 “기억하겠습니다”라고 호응했다. 배우 고 이지한씨의 학교 선배가 연단에 나와 편지를 읽자 이지한씨 아버지인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지한아”라고 부르며 오열했다.

추모 영상에는 가족의 애끓는 사연으로 가득했다. “너의 억울함은 엄마가 다 풀어 줄게. 사랑한다, 우리 아들(고 김동규군 어머니)” “네가 세상을 떠날 때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너는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니(고 김세리씨 어머니)”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언니는 널 위해서 살아갈 거야(고 김유나씨 언니)”. 시민들은 유족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힘내세요”를 외쳤다.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이태원 참사 49일째인 16일 오후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 도로에서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시민추모제를 열고 있다. <홍준표 기자>
▲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이태원 참사 49일째인 16일 오후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 도로에서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시민추모제를 열고 있다. <홍준표 기자>

유족 여섯 가지 요구 “정부는 사과하라”

정부를 향한 성토가 이어졌다. 10여명의 유족은 연단에 직접 올라 ‘너에게 못다한 이야기’라는 이름의 편지를 읽으며 대통령과 정부가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고 조한나씨 어머니는 “참사가 나기 전에 경찰이 투입돼 차량을 통제하는 것을 엄마는 봤다”며 “수많은 인원이 몰릴 때도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경찰이 직무를 유기해 서서 숨도 못 쉬고 견디다가 허망하게 집에 돌아오지 못했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종철 대표는 “시체검안서에는 사망일시 ‘미상’, 사망장소 ‘도로’, 사망종류 ‘기타’로 기록돼 있다”며 “아직도 우리 자식들이 어떻게 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는지 정부는 말해 주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족들끼리 만나는 것에 정부는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단 두 명의 유족부터 시작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연락처를 수소문한 끝에 희생자 101명의 연락처를 얻었고 190명의 유족을 만났다”며 “우리가 애타게 유족을 찾아 헤맬 때도 정부는 없었고 지금도 연락처를 주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서 이지한씨의 할아버지가 이날 처음으로 손주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됐다며 고개를 떨궜다.

참사 당일 최초신고자인 이태원 주민은 대신 낭독된 메시지로 정부 행동을 지적했다. 이 주민은 “국가의 안전 경비는 없었다. 지난 49일 동안 평범한 대한민국 아줌마는 매일 화가 끓어오를 때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다’를 주문처럼 되뇌었다”고 말했다. “책임자를 밝혀 내라” “윤석열이 책임져라” 등의 시민들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2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구성한 시민대책회의는 공동호소문을 낭독하며 여섯 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이들은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대통령이 공식 사과할 것 △피해자 참여 속에 성역 없이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이태원 참사 기억과 희생자 추모를 위한 공간을 마련할 것 △피해자 소통 보장 및 인도적 지원 등 종합대책을 마련할 것 △2차 가해에 대한 적극적인 방지책을 마련할 것 △재발방지 및 안전한 사회를 위한 근본 대책을 마련할 것 등을 요구했다.

시민들 “뻔뻔한 정부에 분노” 한목소리

시민들은 정부 대응에 문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LED 촛불을 켜고 홀로 추모제를 지켜보던 이아무개(26)씨는 “세월호 참사 때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녀 잊을 수가 없었는데 8년이 흘러도 바뀐 게 없는 현실이 화가 나 안산에서 올라왔다”며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킬 의무가 있는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공무원이 분명하게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만든 분향소에는 사진과 이름이 없었는데, 이제라도 제대로 된 추모를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전통 호위무사 복장으로 참여한 용산구 시민 권아무개(27)씨도 “참사 당일 정부는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지적했다. 희생자들을 지켜 주고 싶어 무사 복장을 했다는 권씨는 “용산 참사도 뉴스를 통해 봤는데 이태원 참사까지 겪으니 참담하다”며 “국가가 책임지기는커녕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대통령 사저 지키는 데 경찰병력을 배치해 이런 참사가 일어났던 것 같다”고 성토했다.

대구에서 상경해 일하고 있다는 구아무개(58)씨는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추모제에 나왔다. 구씨는 “윤석열 대통령은 평생 검사만 하다가 대통령이 돼 대화와 소통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며 “참사 책임자에 대한 처벌 의지가 있는지 궁금하다. 20대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어느 누구라도 지금 유족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데, 정부가 대처한 것이 무엇이냐”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유족과 참여자들은 추모제가 끝나고 용산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했지만, 경찰은 미신고 행진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실에서 60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행렬을 막아섰다. 한동안 대치하다가 유족 대표들이 6대 요구사항이 담긴 서한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49재에 종로 열린송현광장에서 개최된 윈·윈터 페스티벌 개막식에 참석해 논란이 일고 있다.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17일 서면 브리핑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님, 10·29 참사 49재에 잠시 들를 수는 없었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정의당도 같은날 류호정 원내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희생자들의 부모와 가족이 오열했던 그 시각, 윤 대통령은 크리스마스트리 점등 버튼을 눌렀다. ‘술 좋아한다고 술잔 샀다고 그러겠네’ 농담도 했다”며 “대통령 부부의 함박웃음에 어질하다”고 지적했다.

2차 시민추모제는 이달 30일 열릴 예정이다.

▲ 10·29 이태원 참사의 유족이 16일 오후 시민추모제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을 하던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홍준표 기자>
▲ 10·29 이태원 참사의 유족이 16일 오후 시민추모제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을 하던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홍준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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