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고은 기자

“화장품 매장이 작은 경우 1명이 일하는 곳도 있습니다. 아무리 심한 일을 당해도 매장을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냥) 서 있어야 해요. 직원들이 눈이 퉁퉁 부어서도 입으로는 웃으면서 고객을 응대하는 거예요. (고객과) 분리를 해야 하는데 인원이 없으니까 분리를 못하는 거죠.”(화장품 브랜드 매장 판매직 사원 A씨)

“사내 프로그램에는 상담 심리치료를 근무시간에 받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사측에서는 고객과 언쟁이 있었기 때문에 근무시간에 받을 수 없다고 한 적 있어요. ‘고객의 컴플레인이 있으면 안 된다. 유급으로 줄 수 없다’는 기조였어요.”(마트 사원 B씨)

서울시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가 지난 8월 서울지역 유통산업 감정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증언이다.

고객응대 노동자 보호를 위한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된 지 18일로 4년이 지났다. 감정노동 종사자에 대한 사업주의 조치의무를 법으로 규정했지만 현장에서는 현실과 제도의 괴리로 인해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보호조치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장내 해결 모색’ 10명 중 1명에 불과
조직차원의 대응 불신 높아

서울시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는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걸스카우트연맹에서 지난 8월10일부터 9월2일까지 서울지역 마트·백화점·면세점에서 일하는 감정노동 종사자 98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지역 유통산업 감정노동자 10명 중 6명(59.4%)은 폭언·폭행·성희롱·직장내 괴롭힘을 경험했다. 폭언·폭행·성희롱·직장내 괴롭힘을 경험했을 때 “주변 동료와 푸념하거나 하소연한다”고 답한 경우가 48.8%, “참고 넘긴다”는 경우가 46%로 나타났다. 직장 상사나 동료 등에 도움을 요청(9%)하고 고충처리위원회 등을 통해 문제 해결을 요청(2.2%)한 경우는 10명 중 1명 정도에 불과했다.

유통산업 감정노동자 상당수가 폭력과 괴롭힘에 노출돼 있는데도 이에 대한 사업장 차원의 대처는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고객이 무례한 태도를 보일 때 “관리자가 중간에 개입해 직원을 보호”한 경우는 54.2%, “업무에서 제외돼 휴식”한 경우는 49.3%로 절반 수준에 그쳤다.

건강권 보호를 위한 지원도 부족했다. 응답자 10명 중 1명(10.1%)만 병원치료 지원이 “있다”고 답했고, 건강문제 관리 방법 교육도 18.1%만 “있다”고 답했다. 정기적 건강문제 평가조사(12.6%)나, 건강문제시 휴직 부여(10.1%)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안전보건공단 지침에 따른 감정노동평가도구를 활용해 서울지역 유통산업 감정노동자 상황을 살펴보니, 갈등 상황에서 재량권이 없어 입은 정서적 손상을 나타내는 ‘감정부조화’ 위험 수준이 86.6%였다. 조직차원에서의 관리방안에 대한 ‘감정노동 보호체계’ 또한 위험수준이 86.9%나 됐다. 재량권 밖의 영역을 요구하는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때가 많지만 직장 안 대응에 대한 불신은 높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 어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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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보호 매뉴얼 있는지조차 몰라”
피해자 보호조치 핵심은 가해 고객과 분리

유통산업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콜센터 상담사들도 감정노동자보호법 시행 이후 실질적 변화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날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콜센터 상담사들은 고객응대업무 매뉴얼은 유명무실하고 악성고객 상담 이후 휴게시간도 제대로 보장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곽은선씨는 “개인정보교육은 매달 진행하는데 상담사들 보호지침은 매뉴얼이 있어도 제대로 된 교육도 없고 상급자조차 매뉴얼의 존재를 모르는 상황”이라며 “악성민원에 대한 조치사항이 마련돼 있었는데 매니저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고 전했다. 김승진 공공운수노조 LG헬로비전콜센터지부장은 “콜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하면 실적 저조로 압박을 받기 때문에 악성고객 응대 이후에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시행규칙상 폭언 발생시 취해야 할 조치와 예방조치로 업무 일시적 중단과 휴게시간 연장, 고객응대업무 매뉴얼 마련 등이 명시됐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그림의 떡’이라는 주장이다.

한인임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정책팀장은 “피해를 당한 노동자가 휴게시설에서 일정 시간 쉬면서 정신적 피해를 완화할 수 있는 시간이 부여돼야 한다”며 “노동부 유권해석상 30분 정도로 휴게시간을 정하고 있지만 시행령대로 해석하면 30분 휴게시간 이후 노동자는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팀장은 “피해자 보호조치의 핵심은 문제 발생시 트라우마를 최소화하는 것으로 폭력 등을 행사하는 고객과 분리가 가장 중요하다”며 “실질적인 분리 조치가 가능하려면 관리·감독자에게 가해 고객 처리를 어떻게 할지에 관한 권한을 충분히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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