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영등포구의 홈네트워크 시스템 제조업체인 H사의 사무실 모습. 현재는 폐업하고 다른 상호명으로 바꾼 것으로 조사됐다. <해고자 A씨 제공>

“너 같으면 너 같은 애를 데리고 일하겠어? 회사에서 지시한 일만 해!”

“원직복직을 시켜 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닥치고 지시한 일만 하라고.”

서울 영등포구의 홈네트워크 시스템 제조업체인 H사의 이사가 해고 이후 부당해고 판정으로 복직한 노동자에게 청소를 지시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H사는 노동위원회의 복직명령을 이행하면서 원래 업무가 아닌 직책으로 ‘가짜 복직’을 시켰다가 최근 항소심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개발자였던 직원은 해고 이후 복직하며 청소 업무를 맡았고, 두 번째 복직할 때는 유지보수 업무가 떨어졌다. 창고에 있는 책상에서 일하면서 휴대전화 사용도 제한됐다. 복직 이후 연봉마저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 심지어 이사가 해당 복직자에게 머그잔을 던진 것으로 전해져 충격을 주고 있다.

권고사직 거부에 입사 6개월 만에 징계해고
‘무단침입 고발’ 으름장에 경찰 출동까지

3일 <매일노동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고법 행정10부(재판장 성수제 부장판사)는 H사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최근 회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사건은 2020년 5월께 A(48)씨가 해고되면서 시작됐다. H사 회장이 형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대신 경영을 총괄한 B씨는 5월18일 A씨에게 사직을 권고했다. A씨가 기술연구소에서 담당한 ‘월패드(가정용 기기를 제어하는 단말기)’의 신규 개발을 중단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A씨는 석 달치 월급을 요구했지만, 사측이 수용하지 않자 A씨도 사직을 거부했다. 그러자 사측은 열흘 뒤 해고를 통보했다. A씨가 대주주에게 회사 ‘매각’을 제안한 부분을 문제 삼았다. A씨는 나흘 전 수석연구원과 함께 대주주인 관련 회사 대표를 만나 “회사를 매수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있으니 인수합병(M&A) 의사가 있으면 고려해 보라”는 취지로 권유했다.

사측은 이를 회사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로 판단했다. 어려운 경영환경에 있는 회사의 대외 신뢰도 하락으로 인해 영업력이 악화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징계사유에 들어갔다. 경영자에게 보고되지 않은 인수합병 추진이라는 것이다. 입사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A씨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회사에 출근해 컴퓨터를 사용하자 사측은 퇴거를 요청했다.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까지 벌어진 끝에 A씨는 경찰의 중재로 회사를 나와야만 했다.

▲ 노동위원회의 복직명령 결정에 청소와 유지보수 업무 지시를 받았던 홈네트워크 시스템 제조업체 H사의 연구원 A(48)씨가 지난달 1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매일노동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고법은 최근 항소심에서 부당해고라고 판결했다. <홍준표 기자>
▲ 노동위원회의 복직명령 결정에 청소와 유지보수 업무 지시를 받았던 홈네트워크 시스템 제조업체 H사의 연구원 A(48)씨가 지난달 1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매일노동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고법은 최근 항소심에서 부당해고라고 판결했다. <홍준표 기자>

연구소 출입금지에 휴대전화 사용금지
직원 앞에서 컵 던지고 허드렛일 시켜

이후 사측의 괴롭힘은 본격화했다. 서울지노위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서가 접수되자 사측은 같은해 6월8일 A씨에게 복직을 명령했다. 그러나 A씨에게 부여된 업무는 ‘청소’였다. 기술연구소 입구에는 출입금지 공고문이 붙었고, 관리실 구석에 빈 책상만 놓였다.

복직 당일 이사의 폭언이 이어졌다. A씨가 녹음한 파일에 따르면 B씨는 “창틀 먼지를 닦아.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다. A씨가 원직복직이 아니라고 따지자 “노동위원회에 가서 얘기하라”고 윽박질렀다. A씨는 다음날 항변서를 보내고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원직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해 7월 서울지노위가 A씨의 구제신청을 인용하자 사측은 재차 복직명령을 내렸다. A씨는 7월31일 기술연구소로 출근했지만, ‘유지보수(AS) 업무’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기술연구소는 여전히 출입하지 못했고, 창고 정리 업무가 부여됐다. 휴대전화 사용도 사실상 금지됐다. 게다가 B씨는 8월3일 A씨의 구제신청 내용을 문제 삼으며 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A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머그잔을 A씨가 앉은 의자 바로 뒤 바닥에 내던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A씨는 “숨통이 조였다”고 토로했다.

연봉도 절반 가까이 삭감됐다. 유지보수 담당으로 근무부서가 바뀌면서 급여를 변경한다고 사측은 통보했다. A씨는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A씨는 이후 연차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회사는 연차 승인을 받지 않았다며 출근을 독촉했으나 A씨가 출근하지 않자 같은해 9월 고용보험 피보험자격 상실 신고를 했다. 지노위는 회사에 이행강제금 500만원을 부과했다.

“정당한 원직복직 아니다” 판결
7차례 형사고소 무혐의, 손배소 승소

회사는 소송전을 불사했다. 중노위도 초심을 유지하자 사측은 그해 12월 소송을 냈다. 해고를 철회하면서 A씨를 원직에 복직시켰고, 해고 전 보수와 같은 급여를 전액 지급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법원은 정당한 복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1심은 복직 이후 A씨에게 지시한 업무가 연구개발과 성격이 질적으로 다르고, A씨가 변경된 업무에 동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해고 사유도 취업규칙 조항에 없는 것으로 적절치 않고, 징계해고 절차 역시 없었다고 지적했다.

사측은 항소했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항소심은 “(회사의 인사조치는) 복직의 외형을 갖춘 후 결국에는 A씨가 스스로 사직하도록 압박하거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도록 방해한 것에 불과하다”고 질타했다.

A씨는 2년여간 복직을 다투며 수차례 형사 고발되기도 했다. 사측은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총 7차례 A씨를 고소했다. 그중 5건은 불송치됐고, 나머지는 검찰에서 혐의 없음(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최근에는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 결론도 나왔다. 재판부는 A씨에게 미지급 임금과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회사에 주문했다. 사측은 되레 A씨가 허위로 구제신청을 해 업무를 방해하고 허위사실 유포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지만 모두 배척됐다.

▲ 서울 영등포구의 홈네트워크 시스템 제조업체인 H사는 2020년 5월 연구원 A씨를 해고한 다음 복직시킨 후 기술연구소의 출입을 금지시키면서 청소와 유지보수 등 잡무를 지시했다. <해고자 A씨 제공>
▲ 서울 영등포구의 홈네트워크 시스템 제조업체인 H사는 2020년 5월 연구원 A씨를 해고한 다음 복직시킨 후 기술연구소의 출입을 금지시키면서 청소와 유지보수 등 잡무를 지시했다. <해고자 A씨 제공>

‘위장폐업’ 정황, 임원은 친인척
사측 ‘끝까지 간다?’ 소송전 계속

H사는 현재 외관상 폐업한 상태로 파악됐다. H사의 등기사항전부증명서를 보면 지난해 6월 다른 업체로 상호를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H사의 대표전화는 없는 번호였다. 기존 임원진은 대부분 회장의 친인척 관계였다고 A씨는 밝혔다. 그는 “자녀들에게 사업을 물려주는 사업가들이 많을 텐데 본인들이 마음대로 직원들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자신과 같은 일을 사회초년생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A씨는 “IT 분야를 포함해 우리나라는 각개전투가 심하다”며 “경력 쌓아서 이직하면 될 것이라고 현실을 회피하면서 노조 가입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번 일을 겪으며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A씨를 대리한 정은혜 변호사(새신법률사무소)는 “회사는 노동자가 구제신청을 했다는 이유로 복직명령을 이행하는 척 ‘겉모습’을 만들어 내려고 복직명령을 한 후 부당한 대우 등을 통해 노동자의 인격을 말살했다”며 “사법 당국은 사용자가 노동자를 축출하고 이의제기를 봉쇄하는 방식으로 사법시스템을 악용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측은 지난달 21일 행정소송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한 상태다. A씨는 회사가 소송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두 번째 복직 이후 녹취록에 따르면 B씨는 A씨에게 “행정소송 결론이 날 때까지 한 2년 걸려. 그때까지 회사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A씨는 끝까지 다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회 정의가 살아 있다는 걸 (법원이) 회사에 보여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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