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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업자 형태로 위탁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실질적으로 근로를 제공했다면 사업장에서 사망·부상이 발생했을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서 정한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계약의 형식과 관계없이 실질적인 근로제공 여부를 따져 근로자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한 2019년 대법원 판결이 재확인됐다.

유지·보수계약 체결, 설비에 깔려 사망
법원 “근무 실질은 근로자와 가깝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재판장 김국현 부장판사)는 최근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에서 일하다 숨진 A씨의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공단이 항소하지 않아 지난 1일 판결이 확정됐다.

사건은 A씨가 2020년 5월 경기도 화성의 한 자동차부품회사와 ‘제조설비 유지보수’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작했다. 유압설비 수리·개조 업무를 담당한 A씨는 그해 7월 유압설비를 지게차 운전기사에게 운반해 달라고 부탁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 운반 도중 넘어진 유압설비에 깔려 즉시 병원에 후송됐지만 결국 숨지고 말았다.

유족은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해 달라고 공단에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A씨가 회사와 위탁계약을 맺어 근기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재판에서 A씨를 근로자로 볼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으로 다퉈졌다.

법원은 A씨가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공단의 처분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고인은 회사와 제조설비 유지보수 계약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핵심 설비의 유지·보수업무를 담당한 근로자”라고 판시했다. 계약서 내용이 중요한 판단 근거로 고려됐다. 계약서에는 설비 유지·관리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정기적인 점검과 장비 고장시 즉각 대응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회사의 승인 없이 임의로 설비를 유지·보수할 수도 없었다. 사실상 회사의 지시를 받아 작업한 셈이다.

아울러 A씨가 회사에 전속돼 근로를 제공한 점도 작용했다. A씨는 회사가 제공한 숙소에서 지내며 주 5일간 근무했다. 재판부는 “회사는 고인이 개인사업자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2012년께부터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사무실을 갖고 있지 않고 다른 소득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회사 상무도 ‘업무 성격상 회사에 상주하며 상시 대기했다’고 진술했다.

A씨가 업무량과 상관없이 고정적으로 일정한 금액을 정해진 날짜에 받은 사실도 제시됐다. A씨는 유지·보수 비용으로 매달 440만원을 받았고 별도의 대가는 없었다. 이 밖에 △회사 직원과 함께 근무한 점 △회사 장비를 사용한 점 등도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계약 형식이 위탁계약으로 체결됐을 뿐, 근무한 실질은 여타의 근로자와 더 가깝다”고 못 박았다.

의류업체 개인사업자도 근로자성 인정
법조계 “심사 단계부터 실질성 검토 필요”

의류업체와 도급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가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은 사건도 뒤늦게 알려졌다. 골절상을 입은 B씨는 2020년 5월 서울행정법원에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해 지난해 5월 승소했다. 공단이 소송을 포기하면서 1심이 그대로 확정됐다.

B씨는 2014년부터 서울 강남구의 한 의류업체에서 5년간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다가 2019년께 ‘라벨 교체작업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그해 11월1일 불량품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계단이 무너져 추락했다. 이 사고로 발목이 분쇄되는 중상을 입었다.

B씨는 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사업자라는 이유로 거부됐다. 직원을 채용해 임금을 지급하고, 계약 단가에 따른 대가를 받은 점이 작용했다. 임대료를 지불하고 공간을 이용한 부분도 불승인의 근거가 됐다.

법원은 B씨가 본사 직원으로부터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았다며 공단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라벨 부착·수선’ 업무가 공정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사실상 취업규칙에 준하는 계약이 체결됐다는 것이다. 실제 B씨는 직원들과 근무시간이 동일했고, 휴일도 회사 일정과 조율해서 결정했다.

작업량에 따른 단가를 회사가 결정한 점도 산재 인정의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B씨의 보수는 노동의 양과 질을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노무제공을 통한 이윤 창출과 손실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5년 이상 아르바이트를 한 사실도 근로제공의 계속성과 전속성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으로 봤다.

법조계는 근로복지공단 심사 단계부터 실질적인 근로제공 여부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B씨를 대리한 김용준·김위정 변호사(법무법인 마중)는 “채용 당시 사용자가 근로자성을 인정했는데도 공단은 현재 사측의 주장만으로 근로자성을 부인했다”며 “근로자성 판단시 사용자의 주장을 주로 신뢰하는 업무 관행은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씨의 유족을 대리한 문성덕 변호사(한국노총 중앙법률원)도 “회사의 핵심 설비를 유지하고 보수업무를 담당한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인정된 데에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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