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대단한 업적을 이루신 분을 멀리서 지켜본다는 느낌보다 친근한 이미지를 주고 싶었어요. 영화 제목을 <태일이>로 정한 것도 이런 측면이 컸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를 연출한 홍준표(36·사진) 감독은 전태일 열사를 ‘청년 전태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51년 만에 애니메이션 영화로 재해석한 <태일이>. 홍 감독은 ‘사랑스러운 청년’의 모습을 따뜻한 색감으로 그렸다.

<매일노동뉴스>는 12월1일 개봉을 일주일 앞둔 지난 24일 홍준표 감독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스튜디오 루머’에서 만났다. 그는 2017년 영화제작사 명필름의 제안을 받은 뒤 3년간 이 작품에만 꼬박 몰두했다고 한다. <태일이>는 그의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이다.

“친구 같은 모습 보여주고 싶었다”
“배우들 엄청난 관심, 제작자로서 뿌듯”

-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태일이>를 연출하게 된 계기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내 방식대로 이야기를 해 보자고 마음먹었고, 자료를 찾던 중 전태일 열사의 수기 메모들을 보게 됐다. 메모에는 ‘왜?’라는 단어가 상당히 많았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많은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불안한 모습들을 메모에서 발견하면서 젊은 청년의 안쓰러운 모습을 현세대에 투영해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모를 보고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 애초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기인 지난해 개봉하려고 했다가 미뤄졌다. 이유가 무엇인가.
“완성도를 높이는 게 우선이었다. 조금 더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듬어 보자고 협의했다. 결과적으로 50주기에 개봉하지 못했지만, 몇 주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많은 이들이 전태일을 얘기할 기회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 <태일이>를 어떤 영화로 만들고 싶었나.
“어떤 이야기를 할지 방향성을 정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기존에 전태일 열사를 다룬 콘텐츠보다 애니메이션만이 가지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전태일이라고 하면 열사·분신·근로기준법 등 키워드가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태일이>만큼은 그 부분을 알고 영화를 보더라도 동료이자 친구의 모습을 떠올렸으면 했다.”

-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들은 어떻게 캐스팅했나.
“기본적으로 주요 캐릭터들과 조화를 잘 이뤄야 했다. 인물과 목소리가 따로 놀면 전달에 있어 진정성이 많이 떨어진다. 다행히도 1순위로 점찍었던 배우들이 캐스팅됐다. 다들 엄청난 관심을 두고 계셔서 작업자 입장에서 뿌듯했다. 전태일 열사를 연기한 장동윤 배우는 전태일의 반듯한 느낌을 충분히 구현했다. 게다가 출신지역이 대구라서 미세한 사투리까지 연기라고 할 것도 없이 잘 소화했다. 고 이소선 여사를 연기한 염혜란 배우도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목소리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열사의 아버지를 연기한 진선규 배우는 연극에서 전태일 열사 역할을 할 정도로 워낙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역할을 제안했을 때 무엇이든 좋으니 무조건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한미사 사장역인 권해효 배우 역시 여러 시각에서 한 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악역을 잘 소화해 냈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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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직전 계단에 앉았던 모습, 기억에 남는 장면”

- ‘전태일 영화’로 1995년 개봉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애니메이션 <태일이>는 어떻게 다른가.
“전태일 열사를 ‘태일이’로 부른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매우 가까운 사람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나. 그런 지점에서 기존 영화와 다른 것 같다.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정서로 공간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장 내부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빛의 양을 조절하기도 했다.”

- 전태일 열사는 1948년생이다. 지금 세대가 1970년대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영화에서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나.
“영화 작업 중 가장 어려운 지점 중 하나였다. 지금 세대가 보기에는 그냥 옛날 사람 정도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과거의 열사만 떠올리는 게 아니라 지금 힘들게 근무하는 환경을 생각하는 순간 50년 전의 그들과 지금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다. 그렇게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다.”

- <태일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꼽는다면.
“분신하기 전에 태일이가 계단에 홀로 앉아 근로기준법 법전을 보는 장면이 있다. 태일이가 혼자 그곳에 있으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관객도 그 당시 전태일 열사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어야 했기 때문에 미묘한 지점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차례 표정과 행동을 다르게 표현하면서 작업했던 장면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 사람들은 전태일 열사를 분신하는 모습으로 떠올린다. 영화에서는 짧게 처리했던데, 이유는 무엇인가.
“분신은 전태일 열사 일생에서 큰 사건이지만, 분신에 이르기까지의 삶에 조금 더 집중했다. 하지만 분신 이후 병상에 누워 마지막 순간에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나 배고파요’라고 말한 대사는 무조건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큼은 엄마 품에 안긴 아이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아파하고 점점 숨이 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엄마로서 소명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말이 배고프다는 것밖에 없다는 게 많이 죄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대사를 살렸다.”

“‘사람 전태일’ 마주한 뒤 근로기준법 정독 제안한다”

- 현재 전태일 열사가 살아 있다면 70대 노인이다. 전태일 열사가 <태일이>를 관람한다면 무슨 말씀을 했을 것 같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태일’이라는 소재로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하실 것 같다. 많은 부분이 해결됐을 것으로 믿었을 텐데, 여전히 노동이 화두가 되는 현실을 씁쓸해하지 않을까.”

- 맞다.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현재의 수많은 ‘태일이’에게 무슨 얘기를 건네고 싶나.
“여전히 힘들어 하는 노동자들에게 몇 마디 말로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제안을 해 본다. 법을 알면 도움이 되니 근로기준법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제작 초기에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다. 근로기준법은 길지 않고 문장을 이해하기 쉽다. 영화를 본 뒤 요즘 상황에 대해 궁금하면 근로기준법을 읽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 영화 제작의 노동환경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영화 스태프들이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태일이>를 만드는 동안 스튜디오에서는 근로기준법을 모두 지키면서 작업을 끝내자는 목표가 있었고, 실제로 목표를 달성했다. 법을 지키면서도 작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기본적으로 표준근로계약서는 작성하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 지켜도 기본적인 갈등은 사라지지 않겠나.”

- 그동안 후원이 이어졌고, 노동계에서는 시사회를 열며 릴레이 관람을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감사하다. 대단히 많은 분들이 영화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 후원자 명단을 보면서 감동했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열심히 작업한 만큼 영화를 보러 와주시는 분들께도 좋은 작품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뜻깊게 보셨다면 주변에도 말해 주면 더욱더 좋겠다(웃음).”

- 개봉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애니메이션이 국내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르는 아니라서 선뜻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어색할 수는 있다. 전태일 열사라는 소재 탓에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말했듯이 ‘열사’라는 부분을 조금 지우고 싶었다. 숭고한 희생을 잊자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열사는 잠시 잊고 ‘사람 전태일’을 마주할 것이다. ‘태일이’와 친해지는 기회로 생각하고 가볍게 관람해 주셨으면 한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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