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현장에서 잇따라 발생한 집단 피부질환 사태의 원인이 국내 굴지의 도료업체가 생산한 친환경 페인트(무용제 도료)였던 것으로 최근 확인돼 충격을 주고 있다. 무용제 도료의 문제점을 알리고 재발방지책을 찾기 위해 현장 노동자·활동가·전문가의 글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김신범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지금부터 20년 전 여수의 한 화학공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유를 정제해 만든 제품을 커다란 탱크에 저장했다. 저장탱크를 관리하는 저유팀 직원들은 정기적으로 탱크 위에 올라가 해치를 열었다. 탱크 내에 기름이 얼마나 찼는지 줄자를 넣어 재는 작업(게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탱크 상단에 있는 해치를 여는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은 내게 농담처럼 말했다. “앞으로 넘어지면 죽고 뒤로 넘어지면 산다”고. 해치를 열자마자 탱크 안에 있던 증기가 솟구쳐 올라오는데, 이걸 정통으로 마셨다가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앞으로 쓰려지면 탱크에 떨어져 죽고, 뒤로 쓰러지면 탱크 위에서 기절했다가 나중에 정신 차리고 내려온다는 말이었다. 내가 그 공장에 방문해 있던 중에도 저유소 직원 한 명이 게이징 작업 중에 쓰러지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나는 이렇게 위험한 작업을 다르게 할 방법이 없는지 물었지만, 두꺼운 벽으로 만든 탱크 게이징을 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들 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조금만 숙련되면 바람 방향을 읽을 줄 알게 돼 바람을 등지고 일하면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아주 가끔 죽는 경우가 있지만 정말로 재수 없는 경우”라고도 덧붙였다. 수십년 일해 온 현장의 전문가들이 “답이 없다”기에 한숨만 쉬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문제가 너무도 쉽게 해결됐다. 탱크 내 증기를 빨아들여 태우는 소각장치(RTO)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탱크 상단에 배관을 연결해서 공기를 빨아들여 증기를 태우고 맑은 공기만 대기로 배출하는 장치였다. 저유소 직원들은 이제 바람을 살피지 않아도 됐다. 해치를 열면 증기가 솟구치는 게 아니라 탱크 내로 공기가 ‘쑥’ 빨려 들어갔다. 소각장치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놀라운 개선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기뻐할 수 없었다. 악취와 휘발성유기화합물을 규제하는 법률이 강화되고 여수가 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근본적 개선책이 마련된 것인데, 노동자가 죽을 때는 왜 개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선책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살리기 위한 투자의지가 없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유팀 직원들도 나랑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진작에 고쳐 주지” 하고 누군가 중얼거리는 말이 저유팀 컨트롤룸 밖 복도에 살짝 맴돌다 빠져나가는 걸 들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최근 현대중공업에서 무용제 도료를 사용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집단적으로 피부질환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용노동부에서 임시건강진단 명령을 내렸는데, ‘55명에게 직업성 피부질환이 분명했고, 177명은 관찰을 필요로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안전보건공단 조사 결과 기존 도료보다 무용제 도료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힘이 훨씬 커진 것이 이유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서 또 소각시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현대중공업 등 조선소에서 무용제 도료로 교체하게 된 배경에는 환경보호가 있었다. 도료를 희석하는 시너에 들어 있는 휘발성유기화합물이 공기중으로 배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너를 안 써도 되는 무용제 도료가 개발됐다는 것이었다.

환경부가 2016년 대기환경보존법을 개정해 대형 도장시설이 있는 조선소에 대기오염방지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했다. 여기서 대기오염방지시설이 소각시설을 뜻한다. 새 법률은 2018년부터 시행됐고, 조선소들은 공동 대응을 시작했다. 조선소는 소각시설을 설치하고 유지하는 것보다 무용제 도료 도입이 비용을 크게 절약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무용제 도료를 도입하면 소각시설 설치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대기환경보존법 시행규칙이 개정됐다. 그리고 ‘친환경’이라며 대대적으로 도입한 무용제 도료를 사용하던 조선소 도장 노동자들에게 피부질환이 대거 발생했다.

20년 전 여수에서는 소각시설 설치 때문에 노동자들이 죽지 않아도 됐지만, 20년 후 울산에서는 소각시설을 없애기 위해 도입한 무용제 도료 때문에 노동자들이 피부질환으로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20년 전에는 노동자를 살린 거 아니냐 하겠지만, 여수나 울산이나 내 눈에는 똑같아 보인다. 노동자 안전과 건강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환경과 비용만 따지는 태도가 너무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것으로 본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이 발생할 것 같은 걱정이 든다. 환경보호라는 이름으로 제품이나 작업방법이 바뀔 때 노동자는 앞으로도 안중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금속노조에서 무용제 도료의 사용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이 요구에 동의한다. 무용제 도료가 환경에 이득이 된다는 점에서 도입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를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무용제 도료 도입은 멈추는 것이 맞다. 이제부터 노동자와 환경을 모두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정부와 조선소와 금속노조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면, 적어도 이런 일이 무대책으로 반복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화학물질의 제조·유통·사용·폐기 전 단계에서 환경뿐 아니라 노동자의 노출과 위험이 사전에 평가되고 고려되는 새로운 태도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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