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진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근로복지공단 산재처리 지연에 대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항의 농성이 마무리됐다. 고용노동부와 협의해 제도개선과 산재처리 기간 단축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투쟁은 일하다 아픈 노동자들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산재처리가 지연되면 산재노동자들은 생계 어려움을 겪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현업에 복귀하게 된다. 특히 산재처리는 어렵고 까다롭다는 인식을 만들어 산재신청 자체를 포기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은 국내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의 3분의 2 이상이 은폐됐다는 통계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30명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한 산재은폐 추정치는 82.7%에 달한다. 이번 통계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제외한 결과이지만, 우리 사회의 산재은폐 규모가 비대하고 보편화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각한 질병 산재 은폐

사고 산재의 경우 사고 발생 유무, 치료 여부에 따라서 고용노동부에 산업재해발생조사표를 제출하지 않으면 산재은폐로 처벌된다. 그러나 질병은 다르다. 재해자가 병원에서 진단을 받더라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해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통과해야만 산재통계에 반영된다. 그러나 재해자가 산재신청을 하지 않으면, 산재은폐에 해당하지 않는다.

직업성 암에 대한 왜곡된 통계가 여기서 도출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매년 신규 암환자의 4% 정도를 직업성 암으로 추정한다. 이를 우리나라 2018년 신규 암환자 24만4천명에 대입하면 어떨까. 9천753명에게 직업성 암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판정현황을 살펴보면, 2018년 직업성 암 산재신청은 302명이었고, 220명이 인정을 받아서 인정률이 72.8%, 2019년은 386건 신청, 286명 인정으로 인정율이 74.1%이다. 단순하게 직업성 암환자로 추정되는 숫자만을 가지고 산술적으로만 계산을 해봐도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노동자들 가운데 97%는 산재신청조차 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은폐·축소되는 질병 산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강순희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이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산재처리 지연 원인에 대해 노동자들이 무분별하게 산재신청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왜곡했다. 이런 현실에서는 산재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어렵사리 인정받은 한국타이어 산재

최근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정련공정에서 일하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노동자가 업무상재해를 인정받았다. 이 노동자의 산재신청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사측은 지난해 12월 혈액암을 진단받아 충격에 빠진 노동자에게 위로 대신에 희망퇴직 위로금을 빌미로 퇴사를 종용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산재신청 과정에서는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우월적 지위를 활용했다. 공장에서 발암물질을 사용하지 않으며, 국소배기 장치와 방진마스크를 지급했기 때문에 백혈병이 발생할 수 없다는 보험가입자 의견서를 제출했다.

다행히 대전지역에서 전개된 직업성 암환자 찾기 운동의 성과로 금속노조 한국타이어지회에 연락이 닿아 함께 산재신청을 준비했다. 취급하던 물질, 역학조사 결과, 그동안 법원에서 인정된 동료노동자들의 사례를 찾아 지원할 수 있었고 산재 승인을 받았다.

제도 정비, 사회적 인식 개선 필요해

삼성 백혈병 문제로 상징화된 반올림 투쟁 결과 추정의 원칙이 도입됐다. 그러나 제한된 상병과 대상직종으로 많은 피해자들이 적용받지 못한다. 추정의 원칙 적용 기준과 대상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재해자가 병원에서 진단을 받더라도, 병원에서는 재해자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직업과 연관해 어떤 질환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니터링이나 데이터가 관리가 되지 않는 상황과 관련한 제도적 정비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하다 아픈 것이 개인의 문제, 혹은 잘못으로 치부되지 않아야 한다. 일하다 질병을 얻으면 산재보험을 통해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재활을 통해 복귀하는 것이 노동자라면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도록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산재 피해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고용과 노동조건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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