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2019년 12월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이제껏 아무런 진행 사항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역학조사가 끝나지도 못하고 1년8개월이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아내의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됐습니다. 죽음의 고비도 넘기며 가까스로 삶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아내를 생각해서 부디 산재 판정을 서둘러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일하다가 유방암에 걸린 여귀선(39)씨의 남편이 근로복지공단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지난달 보내진 편지다. 남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여씨는 추석을 이틀 앞둔 19일 숨졌다.

직업성 암 역학조사 생략
노동부 지침 ‘유명무실’

여귀선씨는 고교 3학년인 2000년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 입사했다. 2001년 1월부터는 삼성디스플레이 천안사업장 모듈부서에서 2008년 3월까지 일하고 그만뒀다. 각종 화학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되는 공정이었다. 9년 뒤인 2017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반올림의 도움을 받아 2019년 12월에 산재신청을 했지만, 자신이 왜 암에 걸렸는지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반올림에 따르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노동자 중 직업성 질병에 대해 역학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은 11명이 더 있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모르지 않아 2018년 개선책을 발표했다. 노동부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종사자에 대한 산재인정 처리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의 지침을 발표했다. 직업성 암 8개 상병인 백혈병·다발성경화증·재생불량성빈혈·난소암·뇌종양·악성림프종·유방암·폐암의 경우 기존 판례에 비춰 같거나 비슷한 공정에서 종사했다면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 역학조사를 생략하도록 했다. 추정의 원칙이란 작업(유해물질 노출)기간·노출량 등에 대한 인정기준을 충족하거나 의학적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 사업장 유해요인과 발생 질병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인정하는 원칙이다.

문제는 지침 적용을 위한 기준이 좁다는 점이다. 반도체 공정은 크게 △웨이퍼 제조 △산화 △포토 △식각 공정 △박막과 증착 △금속배선공정 △불량 선별(EDS) △패키징 8개 공정으로 분류되고, 각 공정마다 또다시 세부공정으로 나눠진다. 노동부의 역학조사 생략 지침을 적용받기 위해서는 세부 공정에서 직업성 암이 발생한 피해자가 존재해야 한다.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는 “세부공정에서 해당 질병 피해자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하면 역학조사에서 생략되는 이가 거의 없어 실효성 없는 지침”이라며 “여전히 노동부는 반도체 노동자 개인이 유해인자에 노출됐는지를 조사한다”고 주장했다.

“역학조사 생략 기준, 지나치게 까다로워”

역학조사 지연 문제가 10년 넘게 반복되고 있는 만큼 근본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종란 노무사는 “노동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종사자에 대한 역학조사 생략 기준을 세부공정이 아니라 대공정을 기준으로 넓혀야 하고, 반도체를 생산하는 클린룸이 내부공기를 순환시키는 구조인 만큼 반도체 사업장 노동자 모두에게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올림은 “지난달 노동부는 직업성 암에 대해 역학조사가 6개월 이내에 처리될 수 있도록 지도를 강화하고 대책을 마련한다는 내용에 민주노총과 합의했다”며 “합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노동부 대책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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