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청주방송에서 PD로 일하다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1심에서 패소한 후 삶을 등진 고 이재학 PD가, 유가족들이 이어서 진행한 2심에서 승소했다. 지난 13일 청주지법은 고인이 청주방송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부당하게 해고당했음도 인정했다. 해고당한 지 3년, 그리고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후 1년3개월 만에 나온 판결이다. 이 판결문을 보면 기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화가 차올랐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 유가족들이 나서야만 이 판결문 한 장을 받아들 수 있는 방송계의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였다.

이재학 PD는 프리랜서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청주방송 노동자였다. 그래서 이재학 PD는 유서에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라고 썼다. 청주방송만이 아니다. PD나 작가 등 방송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이들은 10명 중 4명이다. 그러나 이름처럼 자유롭지 않다. 방송사가 노동조건을 결정하고 계속 계약 여부도 결정한다. 이들이 노동자이며 권리를 빼앗긴 비정규직임을 모두가 알고 있으나, 방송사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최근 중앙노동위원회가 보도국 방송작가는 노동자라고 인정하고 정규직으로 고용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렸으나, MBC는 이에 불복해서 행정소송에 돌입했다. 우리도 묻는다.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왜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라고.

고용노동부도 마찬가지다. 노동부는 방송사가 언제라도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는 소위 ‘프리랜서’의 징표들을 핑계 삼아 방송계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을 회피해 왔다. 2019년 국정감사에서 작가들이 불안정한 노동실태를 증언하고 특별근로감독을 간절히 요구했으나, 노동부는 2년간 귀를 닫고 있었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가 올해 특별근로감독을 다시 요청하고 나서야 4월 말 지상파 3사의 뉴스·교양 작가들에 대해 특별근로감독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사이에도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부당해고와 임금체불 등에 시달렸다. 그러나 노동부는 제 역할을 한 것이 없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도대체 무엇을 했나. 문체부는 방송계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면서 ‘방송 분야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이에 대한 사용지침도 마련했다. 그런데 현장 노동자들은 표준계약서의 실효에 의문을 제기한다. 방송사들은 계약기간을 일방적으로 명시하고 ‘언제라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임의로 포함해 계약서를 내민다. 이것을 거부하거나 문제제기를 하면 계약해지를 당하니, 비정규직들은 이 계약서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런데 문체부는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놓고 현장점검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뭐 하는 곳인가? 방송과 통신에 관한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라고 하면서 정작 그 방송을 만드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역할을 한 것이 있는가. 방송사 비정규직의 실태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도 제대로 한 바 없다. 그러니 정책도 제대로 나올 수 없었다. 2020년 말이 돼서야 방통위는 지상파 방송사업자가 운영하는 방송국 재허가를 위한 공통 조건으로 ‘비정규직 처우개선 방안 마련’을 요구하기로 의결했다. 2016년 CJ ENM 이한빛 PD의 죽음, 2017년 EBS 박환성·김광일 독립PD의 죽음, 2020년 이재학 PD의 죽음 등 연이은 죽음 이후에야 나온 개선안이었다.

법원은 게으르다. 방송사 노동자들은 법원 앞에서 좌절한다. 방송사에서 일하는 노동자 자신이 노동자임을 직접 증언하고 있는데, 법원은 현실을 들여다보기보다 방송사들이 제출하는 징표만 갖고 손쉽게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다. 방송사에서 노동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보다 몇 가지 서류가 더 중요한 증거가 된다. 법원은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권리를 배제당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이재학 PD는 2심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았으나 그것도 유가족들이 투쟁해 회사가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법이, 그리고 정부가 조금이라도 역할을 했다면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방송사 구조가 그대로 유지됐겠는가. 노동자가 나서서 싸우다가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도 정부가 능동적으로 나선 적은 있는가. 보다 못한 유가족이 그 싸움을 이어 가고, 시민사회의 연대가 시작돼야 마지못해 하나씩 대책을 내놓는 당신들은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 비정규직들로 방송을 만드는 기존 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이들은 죽음의 공범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가슴에 안고 싸우는 유가족과 방송사 비정규직 동료들이 이 공범들의 무심함에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연대의 힘이 더 커지면 좋겠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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