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공든 탑이 무너졌다. 당·정·청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금융노조 IBK기업은행지부가 추진했던 노조추천이사제 무산 과정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당·정·청이 노동자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이번 사안은 노조추천이사제 무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당시 지부와 합의했던 공공기관의 청년 고용정책 개선 합의도 이행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 행위예요. 좌시할 수 없습니다.”

김형선 기업은행지부 위원장(44·사진)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금융위원회가 8일 노조추천이사를 부적격하다며 제외하고 다른 인사를 선임한 것을 두고 지난해 1월 지부와 기업은행, 그리고 당·정·청이 합의한 6대 노사 공동선언을 종잇조각으로 만든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2차 출근저지투쟁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매일노동뉴스>가 14일 오전 서울 중구 기업은행지부에서 김형선 위원장을 만났다.

“노동자와 약속 파기한 당·정·청
청년 고용대책도 뭉갰다”

- 이번 사태를 당·정·청의 노동자 기만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 이번 사안은 노조추천이사제 합의를 무산한 것뿐 아니라 지난해 1월 윤종원 기업은행장 임명 당시 당·정·청이 약속했던 6대 노사 공동선언 자체의 이행 의지가 없다는 점을 선포한 것이다. 선거철마다 노동계에 손을 벌리고, 노동계 역시 노동존중을 강조하는 정부·여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이걸 스스로 부정했다. 6대 노사 공동선언은 자본에 대한 견제뿐 아니라 공공기관의 희망퇴직 제도를 통해 청년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기업은행부터 해 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런 요구를 당·정·청이 4·7 재보궐선거 직후 노동자 뒤통수를 치는 방식으로 뭉갰다.”

- 노조추천이사제를 청와대가 먼저 제안했다고 말했는데 사실인가.
“강기정 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먼저 제안했다. 지난해 1월 청와대가 공공기관 낙하산을 근절하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기업은행에 윤종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임명했다. 명백한 합의 위반이다. 지부는 낙하산 인사에 반대하며 출근저지투쟁을 했다. 투쟁에 돌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기정 당시 정무수석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주말께 모처에서 만났는데 노조추천이사제를 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 어떤 말들이 오갔나.
“무엇을 해 주면 되겠느냐는 식이었다. 본인이 먼저 노조추천이사제를 도입하겠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청년에게 공공기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임금피크제 대상 고연차 노동자의 희망퇴직을 허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이것도 수용했다. 그렇게 마련한 게 6대 노사 공동선언이다. 즉각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최종적으로 노·사·정 간담회 형식으로 합의를 이뤘다. 그 자리에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있었고, 이인영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참석했다.”

- 두 인사는 뭐라고 말했나.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보증을 서는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기업은행 노사의 합의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까지 합의에 참여한 것이다. 지부는 당초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공동 서명도 요구했다. 그러자 은성수 위원장은 자신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서명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최종적으로 노사 간 합의서가 나온 배경이다. 그래 놓고 지금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 노조추천이사제 무산 뒤 은성수 위원장쪽 반응은 어떤가.
“미안하다고만 하더라. 전화가 왔다. 앞서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도 은성수 위원장과 직접 수차례 통화했다. 지금 노조추천이사제 무산 뒤에는 미안하다는 전화만 받았다. 되짚어 보면 약속을 어기고 낙하산 인사를 내려보낸 당·정·청이 다시 그 인사를 관철하기 위해 사회적 약속을 했고, 그걸 어긴 것이다.”

“일방적 제청과 무산, 합의 당시 의지 있었나 의심”

- 합의 당시부터 다른 마음을 먹은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렇게 볼 여지도 있다. 인물에 하자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추천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안 되겠다며 다른 사람을 임명해 버렸다. 사회적 합의 수준으로 기업은행 노조추천이사제를 하기로 했다. 당시 당·정·청의 고위 인사들이 보증했다. 게다가 제안 자체도 청와대 정무수석이 가져왔다. 청와대 비서진이 개인인가. 아니다. 대통령의 수족이고 입이고 귀다. 강기정 당시 수석이 개인 자격으로 한 제안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실제 노조추천이사 임명 과정은 깜깜이였다. 누굴 언제 제청했는지도 알리지 않았다. 노조추천이사가 ‘부적격’하다고 했는데 만약 정말 임명할 뜻이 있었다면 다시 제청하도록 하거나 보완을 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은 일체 없었다.”

- 지부는 그간 노조추천이사제 성사를 확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다. 지부는 원래 국민공모 방식으로 노조추천이사제를 도입하려 했다. 다른 국책은행 노조추천이사제 추진 과정에서 정부쪽은 ‘추천한 인사가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다’며 반려했다. 노조추천이사를 코드로 맞추는 것도 우습지만, 이런 식으로 또다시 무산될 것을 우려해 국민이 지켜보는 방식으로 하려 했다. 그런데 은행쪽이 반대했다. 어차피 될 것인데 국민공모 방식을 취하면 은성수 위원장에게 부담이 간다며 만류했다. 마침 임금·단체협약 갈등을 막 마무리한 국면이라 신뢰를 갖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니 참담한 기분이다.”

“공공기관 희망퇴직 같은 정책 외면이 더 참담”

- 6대 노사 공동선언 이행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나.
“그렇다. 노조추천이사제는 트리거(기폭제)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노조추천이사제가 무산됐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로 인해 6대 노사 공동선언 이행에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노조추천이사제는 기존 지배구조에서 독립된 경영 견제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6대 노사 공동선언 가운데 가장 실현이 쉬운 건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못하겠다는 거다. 그러면 다른 합의사항 이행을 어떻게 기대하겠나.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앞서 말한 공공기관 희망퇴직 제도는 절실하다.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 고연차 노동자에게 돈을 쥐어줘서 내보내자는 게 핵심이 아니다. 지금 2030세대는 양질의 일자리 진출 자체가 막혀 있다. 위를 비우지 않으면 아래를 채울 재간이 없다. 그걸 하자는 거다. 기업은행 노사의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2030세대의 청년 취업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느냐에 대한 합의였다. 근데 노조추천이사제도 못하는 당·정·청이 이를 책임지고 이행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 2차 출근저지투쟁을 예고했다.
“우선 조합원의 동의가 필요하다. 어쩌면 지부 노동자에게 노조추천이사제는 직접 체감하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6대 노사 공동선언을 완전히 무시하고 뒤통수를 친 데 대해서는 공통된 분노가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노총과 금융노조 같은 상급단체도 그런 점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행을 넘어 2030세대에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묻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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