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 오전 서울대병원을 출발한 백기완 선생 운구 행렬이 영결식 장소인 서울광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기훈 기자>

‘노나메기’라고 쓴 만장이 운구 행렬 양옆으로 길게 늘어섰다. 하얀 상복을 입은 풍물패의 소리꾼이 “우리 많은 열사님들, 백기완 선생님이 왔습니다” 하고 외쳤다.

지난 19일 오후 15일 타계한 백기완 선생 하관식이 열린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상여꾼들이 관을 내려 놓았다.

풍물패 북소리에 맞춰 하관식이 시작됐다.

350여명의 추모객들이 다 같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 선생이 지은 시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한 노래다. 백 선생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비롯한 유족들은 통곡했다.

“우리들 앞에서 대신 싸워 주신 선생님이 이제 자연의 흙으로 돌아가십니다. 그저 땅속으로 남김없이 가십니다. 그러나 남기는 것이 있습니다. 남김없이 싸우라는 정신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가십니다. 1명의 싸움꾼이 5명이 되십니다. 10명이 되십니다. 수천, 수만 명이 되십니다. 여러분들, 노나메기 세상 만드는 싸움꾼 되실 수 있나요.”

풍물패 소리꾼이 외쳤다.

백 선생의 큰아들 백일씨가 첫 삽을 떠 흙을 관 위에 뿌렸다. 하관식에 이어 평토제까지 마쳤다. 고인이 묻힌 자리는 전태일 열사 묘소 왼쪽 바로 옆. 평생을 노동자·민중과 함께했던 백기완 선생은 그렇게 전태일 열사 곁에 영면했다.
 

▲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백기완 선생의 마지막 길에 함께 했다. <정기훈 기자>
▲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백기완 선생의 마지막 길에 함께 했다. <정기훈 기자>

“여러분이 또 하나의 백기완 돼 달라”

백일씨는 “안타깝게도 민중의 지도자이신 선생님이 돌아가셨지만, 아버님의 평소 교육방식대로 늘 여러분이 독학으로 공부를 하면 된다”며 “여러분들이 모두 또 하나의 백기완, 또 다른 지도자가 되면 된다. 이것이 백기완 선생이 여러분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유언이 아니겠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 선생은 초등 교육 외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독학으로 시·소설 문학작품을 읽고 영어사전을 모두 외워 영어 천재로 신문에 알려졌다. 하지만 백 선생은 순우리말을 고집한 문필가였다. 이날 하관식에서도 추모객들은 백 선생이 사용한 “질라라비(닭의 옛 이름) 훨훨” “아리아리(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라, 그래도 없으면 길을 만들라는 뜻)” 같은 우리말들을 함께 외쳤다.

장례위원회는 헌화하는 추모객들에게 백 선생의 글씨가 새겨진 봉투에 돈을 담아 나눠줬다. 장례위측은 “선생님은 (사람들이 세배를 올리면) ‘저기 약국가서 돈을 빌려서라도 세뱃돈 줘라’고 하면서 만원씩 쥐어 줬다”며 “여기 오신 분들한테도 그런 마음이실 것 같아 준비했으니 한 분도 빠짐없이 받아 가라”고 했다.

봉투에는 ‘남김없이’라는 백 선생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봉투를 받고는 “와, 나 선생님한테 세뱃돈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월호 아이들, 고 김용균 만나러 떠나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고 백기완 선생의 하관식이 진행됐다. <최나영 기자>
▲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고 백기완 선생의 하관식이 진행됐다. <최나영 기자>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은 이날 오전 서울대병원 발인식, 대학로부터 시청앞 광장까지 이어진 노제와 행진, 서울광장 영결식, 하관식 순으로 진행됐다.

1천여명의 추모객이 몰린 서울광장 영결식은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으로 시작했다. 416합창단·이소선합창단·평화의나무합창단이 불렀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이창현군 어머니 최순화씨는 “별이 된 우리 아이들이 두 손 흔들며 백기완 선생을 환영해 주고, 또 서로 얼싸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며 “저희 세월호 유가족에게 백기완 선생은 존재 그 자체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말했다.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셨던 백 선생님은 저에게는 천군만마였고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김 이사장은 “아들 사고 이전에 일면식도 없던 저와 아들에게 큰 품을 내어주셔서 그 사랑으로 힘 받고 잘 견뎌낼 수 있었다”며 “저 세상에서 용균이를 만나면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잘 있으라고 꼭 한번 안아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조사를 낭독한 문정현 신부는 “용산참사·세월호·백남기 농민, 이 시대의 노동자·농민·빈민의 편에 서서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노나메기 세상에 대한 말씀, 길이 남을 것”이라고 외쳤다. 문 신부의 내리꽂히는 듯한 목소리는 시청 맞은편 건물까지 울려졌다 반사돼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선생님께서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바쳐 한평생 나아가던 삶을 민주노총이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백원담 교수는 어머니 김정숙씨의 편지를 대신 읽었다.

“백기완 선생님. ‘봄이 지나가기 전, 불러보세 우리의 봄 노래’하는 노래 가사를 물어보려 했는데, 이제는 물어 볼 수도 없으니 우리 이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같이 불러요. 물어볼 것이 있으면 언제나 기억하고 있던 우리 남편 같은 사람을 만나서 나는 행복했어요. 멋진 목도리를 휘날리면서 바위 고개 그 언덕 위에서 꼭 기다리세요. 잘잘, 우리 신랑 백기완 씨. 아내 김정숙.”

‘잘잘’은 백 선생이 만든 “잘 있어요. 잘 가요”의 줄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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