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택시청 송탄출장소에서 쉬어 갔다. 김밥 한줄 먹고 힘을 내 본다. <정기훈 기자>

부아아앙~. 굉음을 내며 트럭이 내달리는 도로 옆 갓길에서 울퉁불퉁 자갈길로, 걸을 때마다 움푹 패이는 진흙 길에서 다시 매캐한 매연 냄새가 나는 갓길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발걸음은 평탄한 인도 위에서든 흙길 위에서든 거침이 없었다. 속도는 한결같이 빨랐다. 날랜 발걸음에 그를 따라 걷는 대열이 흐트러지고 참가자들이 뒤처지면서 잠시 쉬어 가자는 주문이 있을 때에만 발걸음을 멈췄다.

“평소보다 훨씬 빨라요. 오늘 직진코스라서 원래 속도대로 가시면 돼요.”

부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함께 걸어온 황이라 금속노조 부양지부 미조직부장의 말에도 김 지도위원은 자꾸만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멈추니까 마음이 더 바쁘다.”

김 지도위원은 잠시 속도를 늦추는가 싶다가도 금세 제 속도를 찾아갔다.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40일 넘게 단식농성 중인 송경동 시인, 정홍형 금속노조 부양지부 수석부지부장, 김우 권리찾기유니온 활동가를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309일간 크레인 고공농성 때보다 24일간 단식때 후유증이 훨씬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앞에서 그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을 보면,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푸른색 작업복 입고 선두 지키는 김진숙 지도위원
뚜벅이 행렬 늘어날 땐 고마움·안타까움 공존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도보행진을 시작한 지 29일차인 지난 2일 길 위에서 김 지도위원을 만났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김 지도위원은 “힘들죠. 그런데 단식하는 사람들보다 힘들겠어요?” 하고 답했다. 두 번째 암수술 이후 방사선치료도 미룬 채 지난해 12월30일 부산 호포역에서 행진을 시작한 그는 늘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도 김 지도위원은 어느새 훌쩍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그를 따라잡으려면 몇 번이고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진 강추위 속에서도 걷기 시작한 지 30분 새 옷은 땀으로 축축했다.

복직 염원을 담은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한 손에는 ‘한진중공업 고용안정 없는 매각 반대’가 쓰인 손팻말을 든 채 양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약 15킬로미터씩 29일을 걷는 동안, 행진 첫날 3명이던 인원은 60배 넘게 불어나 있었다. 일터에서 쫓겨나거나 구조조정 파도에 휩쓸린 노동자들의 발걸음이 모였다. 지난달 31일 경기권에 접어든 ‘김진숙 희망뚜벅이’는 이날 오전 11시 평택역에서 출발해 진위역까지 15킬로미터를 걸었다.

김 지도위원은 2019년 12월에도 도보행진을 했다. 당시 원직복직을 주장하며 고공농성을 하던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부산에서 대구까지 111킬로미터를 걸었다.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가는 거리는 그때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길어졌지만 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노동자들이 합류하며 동행은 거리만큼 늘었다. 이날도 금속노조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 조합원 60여명이 참여했고, 노조 쌍용차지부, 노조 대우버스지회·한국게이츠지회, 철도노조 코레일네트웍스지부 노동자들이 함께 걸었다. 쌍용차지부 조합원 10명 중 오전조 5명은 반차를 내고 왔고, 오후조 5명은 뚜벅이 이후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김 지도위원은 희망뚜벅이 줄이 늘어나는 게 반갑지만은 않은 기색이다.

“(2019년 걸을 때보다) 지금은 해고자들이 훨씬 많아요. 오히려 조건이 안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죠. 노동자들이 연대를 할 때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거든요. (희망뚜벅이) 줄은 안 늘어나야 맞아요. 자꾸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투쟁사업장이 많아진다는 얘기니까.”

김 지도위원 마음에는 이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고마움이 섞여 있다. 그에게 연대란 어떤 의미인지 묻자 “저한테는 가장 절박한 단어죠. 크레인에서도 연대 때문에 살아서 내려왔으니까 저한테는 목숨 같은 거죠”라는 답이 돌아 왔다.

걷는 동안 그의 옆에는 황이라 부장이 늘 함께했다. 2011년 크레인 고공농성 당시 김 지도위원 식사를 챙겼던 황 부장은 도보행진 가운데서도 김 지도위원 보폭에 맞춰 빠르게 걸었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질 땐 속도를 늦추길 제안하고 틈틈이 건강을 챙겼다.

황 부장은 청와대에 가까워질수록 부쩍 지쳐 보이는 김 지도위원 상태가 걱정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체력이 점점 고갈되니까 피로감이 훨씬 더 빨리 생기는 것 같아요. (뚜벅이 쉬는 날인) 월요일에 집에 돌아가서도 청소하고 빨래하느라 충분한 휴식을 보내지 못하시니까.”

▲ 발걸음에 맞춰 내젓는 팔이 앞뒤로 높다. 빠르게 오래 걷기 위한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지난 2일 푸른색 한진중공업 작업복 차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희망뚜벅이 행진 중 경기도 평택 구간을 걷고 있다. <정기훈 기자>
▲ 발걸음에 맞춰 내젓는 팔이 앞뒤로 높다. 빠르게 오래 걷기 위한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지난 2일 푸른색 한진중공업 작업복 차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희망뚜벅이 행진 중 경기도 평택 구간을 걷고 있다. <정기훈 기자>

송탄출장소에서 진위역으로 출발하자 경찰 막아서
“문 대통령이 꿈꿔 왔던 그 나라가 맞는지 묻고 싶다”

등이 땀으로 젖어 든 오후 1시께 중간 휴식지인 송탄출장소에 도착했다. 희망뚜벅이 참가자들은 이곳에서 화장실을 이용하고 김밥과 떡으로 끼니를 때웠다. 걷는 데 집중하느라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김밥은 예상보다 꿀맛이었다. 김밥 한 줄을 해치우고 30분가량 숨을 고른 뒤 참가자들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는데 경찰이 길을 막아섰다. 도보행진을 시작한 이후 경찰이 행진을 막아선 것은 처음이다.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도 김 지도위원은 ‘웃으면서 투쟁’ 정신을 잃지 않았다.

행진대열에서 참가자 한 명이 “경찰 너희들이 해고를 아냐”고 외치자 김 지도위원은 “아저씨 이리 좀 와 보세요”라고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경찰과 대치상황에서 발생한 긴장감 위로 유쾌한 웃음이 번져 갔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희망뚜벅이 참가자들은 결국 다른 길을 찾아 행진을 다시 시작했다. 그 길까지 경찰이 막아서지는 않았다. 참가자들은 도보행진이 수도권에 가까워질수록 감염병 확산방지를 이유로 한 경찰의 압박이 거세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김 지도위원은 이날 오후 3시께 진위역에 도착했다. 도보로 4시간 거리를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3시간30분 만에 걸은 셈이다. 희망뚜벅이는 6일 인덕원역에 도착하며 서울구간으로 진입한다. 7일에는 목적지인 청와대 앞에 도착한다. 김 지도위원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고픈 말이 있다.

“그분이 젊었을 때 키웠던 꿈, 이루고 싶었던 세상을 함께 꿈꿨고 바라면서 싸워 왔던 사람으로서 지금 이 나라의 모습이 대통령이 꿈꿔 왔던 그 나라가 맞는지, 만족하시는지 묻고 싶다.”

 해고된 노동자도, 복직 앞둔 노동자도
“김진숙 복직, 해고 없는 세상” 한목소리

20일 넘게 선두 지키는 대우버스지회·한국게이츠지회

▲ 함께 걷는 사람들이 많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탓에 뒤쪽 사람들이 종종 뒤처지기도 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앞뒤 간격을 맞췄다. 사람들 말수가 점점 줄었다. <정기훈 기자>
▲ 함께 걷는 사람들이 많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탓에 뒤쪽 사람들이 종종 뒤처지기도 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앞뒤 간격을 맞췄다. 사람들 말수가 점점 줄었다. <정기훈 기자>

“코로나19로 집회를 하기도 어렵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옆에 딱 붙어 있으면 그 자체로 저희 문제도 같이 이슈화할 수 있으니까, 선두를 벗어날 수 없어요.”

2일 오전 평택역에서 출발한 ‘김진숙 희망뚜벅이’ 대열에서 만난 금속노조 대우버스지회 조합원 최호준(41)씨가 한 말이다. 최씨를 비롯한 대우버스지회 조합원 4명은 김 지도위원의 빠른 걸음에 맞춰 이날 처음부터 끝까지 선두권을 유지했다. 이들은 대구지역에서부터 20일 넘게 희망뚜벅이로 참여해 김 지도위원 옆에서 걷고 있다. 지난해 10월4일 자일대우상용차(대우버스)는 생산직·사무직 노동자 350여명을 정리해고했다. 노사 간 교섭 채널은 열려 있지만 전원복직을 주장하는 지회와 일부 인원만 재채용하는 방식을 고수하는 사측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대우버스지회와 같은 마음으로 노조 한국게이츠지회 조합원 4명도 선두를 지키며 걸었다. 한국게이츠는 지난해 6월26일 제조시설을 폐쇄하며 직원 147명을 해고했다. 대우버스지회와 한국게이츠지회 조합원들은 20일 넘게 뚜벅이 생활을 함께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코로나19를 명분 삼아 해고된 노동자라는 점에서 동지애도 각별하다. 희망뚜벅이가 쉬는 날인 월요일이면 또다른 투쟁사업장을 함께 찾아가 연대하기도 한다. 15킬로미터가량씩 걷고 숙소에 들어가면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가 번지지만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피로를 풀며 다음날 또다시 걷기를 반복해 왔다.

이날 노조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 조합원 60여명도 뚜벅이 대열에 참여했다. 이들은 이날로 ‘부당전보 철회’와 ‘자회사 방식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며 천막농성에 나선 지 256일을 맞았다. 투쟁기간이 길어질수록 속이 타 들어가지만 김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찾은 희망뚜벅이에서 오히려 이들이 “힘을 얻고 간다”고 입을 모았다.

해직 공무원 복직특별법 통과로 복직을 앞둔 공무원들도 참여했다. 복직을 해도 4년 남짓 일할 기간만 남은 공무원노조 강원본부 동해시지부 조합원 곽영호(57)씨는 “(김 지도위원 복직은) 당연히 돼야 하는 문제를 정부가 안이하게 대처한 측면이 있다”며 “복직을 계기로 더 이상 해고를 쉽게 할 수 없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0년 전 희망버스에 올랐던 시민도 김 지도위원 트위터를 보고 뚜벅이에 참여했다. 출근시간도 미룬 채 평택역을 찾은 함민희(39)씨는 15킬로미터를 걷고 나서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한단다. 함씨는 대학생 시절 선배들을 따라 찾아간 투쟁사업장에서 김 지도위원을 만났다. 당시 거친 말들을 내뱉는 김 지도위원을 보고 ‘왜 저렇게까지…’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졸업 이후 사회에 나가 보니 노동자의 녹록지 않은 삶을 겪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함씨는 “2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푸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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