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법원의 무게추는 ‘노동존중’으로 다가서고 있는 걸까. 올해 각급 법원에서는 노동기본권을 확충하는 판결이 이어졌다. 해묵은 과제였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오며 합법화의 길이 열렸고, 산재유족 특별채용 단협은 유효하다는 법원 판단으로 고용세습 논란도 종지부를 찍었다. 간접고용 노동자에게 원청 사업장은 ‘삶의 터전’으로 차별받지 않고 노동 3권을 누릴 수 있다는 판결과, 산별노조 조합원이 개별기업 쟁의행위에 참가할 수 있다는 판결도 주목을 받았다.

전교조 7년 만에 제자리로
‘노조 아님’ 통보 제도 역사 속으로

1999년 ‘불법단체’에서 합법노조로 인정받은 뒤 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법외노조가 됐던 전교조가 7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9월 박근혜 정부 시절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 해직자 9명이 가입해 있다는 이유로 ‘노조 아님’ 통보를 내린 것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법외노조 통보가 단순히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의한 보호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 3권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봤다. 따라서 법률 자체로 규율하거나 시행령에 위임한다는 규정 없이 노동 3권에 대한 본질적인 제한을 규정한 법외노조 통보는 법률유보원칙에 위배된다고 판시했다.

법외노조 통보처분의 근거가 됐던 노조법 시행령 9조2항은 이 판결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대법원은 “법외노조 통보제도는 국민의 대표자인 입법자의 결단에 따라 폐지된 노동조합 해산명령 제도를 행정부가 법률상 근거 내지 위임 없이 행정입법으로 부활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간접고용 노동자 원청 사업장에서 쟁의행위,
산별노조 조합원 사업장 내 집회 참여 모두 ‘합법’

간접고용 노동자와 ‘비종사근로자’ 모두 사업장 내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취지의 판결이 이어졌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9월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시설관리·청소업무 등을 하는 노동자들이 원청인 수자원공사 사업장에서 벌인 파업이 적법하다고 판단하고, 업무방해·퇴거불응 등 혐의를 무죄로 판결했다. 수자원공사의 ‘실질적 지배력’과는 무관하게 원청 사업장에서 노동을 제공하고, 원청이 그 노동의 결과에 따른 이익을 누리고 이를 위해 근로 장소로 제공했다면 쟁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도급인 사업장이 수급인 소속 근로자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곳”이라며 “파업이나 태업은 도급인 사업장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일정 부분 도급인의 법익이 침해되더라도 그것이 항상 위법한 것이 아니고 도급인으로서는 사회통념상 이를 용인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해당 기업 소속 노동자가 아닌 산별노조 조합원도 사업장 내 집회 참여가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7월 금속노조 충남지부 조합원 200여명이 유성기업 아산공장 인근에서 결의대회를 진행하다 공장 안으로 진입한 것을 정당한 쟁의행위로보고 공동주거침입죄 등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유성아산지회 조합원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쟁의행위를 했고 이러한 사정은 지부 조합원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아니다”며 “집회 참여는 산별노조의 조합 활동으로서 성격을 가진다”고 밝혔다.

시간급 통상임금 산정방식 변경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마무리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통상임금 관련 쟁점은 대부분 정리가 된 상황이다. 올해 ‘시간급 통상임금’ 산정방식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변경됐다. 법정근로시간에 고정적으로 연장·야간근로를 하는 버스·택시기사 등의 통상임금이 높아지게 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1월 버스회사 퇴직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소송 상고심에서 이같이 판시했다. 대법원은 “시간급 통상임금의 산정기준이 되는 총 근로시간에 포함되는 약정 근로시간을 산정할 때는 특별한 정함이 없는 한 근로자가 실제로 근로를 제공하기로 약정한 ‘시간수 자체’를 합산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연장·야간근로수당의 기준이 되는 시간급 통상임금을 산정할 때 ‘실제 일한 시간’으로 기준이 바뀐 것이다. 기존에는 연장·야간근로를 1시간 하면 임금 가산율을 고려해 1.5시간 일한 것으로 판단했는데, 이를 실제 일한 1시간만 적용하라고 판례를 변경했다.

통상임금 소송은 기업의 ‘신의칙’ 항변을 법원이 받아들이는지 여부에 따라 노동자들이 울고 웃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8월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 상고심에서 노동자 손을 들어줬다.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이 9년 만에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대법원은 1·2심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기아차 노동자들의 통상임금 청구가 신의칙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반면 쌍용자동차·한국지엠·아시아나항공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신의칙 항변이 받아들여졌다.

파견법 피하는 ‘계열사 끼워 넣기’ 제동
잠정합의안 찬반투표 소수노조 배제 ‘아쉬운 판결’

완성차 공장 대부분 하도급 업무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잇따르는 가운데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적용을 회피하려는 사측의 ‘꼼수’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계열사를 거친 재하도급 형태로 파견법을 우회하려는 행태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서울중앙지법 41민사부(부장판사 정도영)는 2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현대차가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소송을 제기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1차 하청뿐만 아니라 현대차가 도급을 준 현대글로비스와 재하도급계약을 맺은 2차 하청노동자도 포함돼 있었다.

재판부는 “2차 사내협력업체로부터 직접 근로자를 제공받아 실질적으로 사용하였음에도 단지 2차 사내협력업체들과 명시적인 계약 체결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용사업주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본다면 제2 사내협력업체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파견법의 적용을 손쉽게 회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게 된다”고 설명했다.

‘노조파괴’에 시달린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판결도 이어졌다. 유시영 유성기업 전 대표이사가 노조파괴를 위한 목적으로 회사자금을 컨설팅 자문에 사용한 것이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원심을 대법원이 확정했다. 유성기업 노조활동에 개입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받은 현대차 임직원들의 경우에도 항소심에서 원심을 유지했다.

노동자들을 웃게 한 판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섭대표노조가 단체협약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에 소수노조 조합원들을 참여시키지 않아도 공정대표의무 위반이 아니라는 법원 판단이 나오자 소수노조를 사실상 배제하는 판결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10월 금속노조가 소속 6개 지회 사업장 내 교섭대표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단체협약 무효확인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이 같은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은 “교섭대표노조 대표자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참여한 노조 및 조합원 전체를 대표해 독자적인 단체협약 체결권을 가지므로 소수노조나 그 조합원 의사에 기속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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