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우리는 노동자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지난 19일 오후 1시. 노동자 5만여명이 서울광장에 모여 한목소리로 외친 구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이 노동개악을 통한 재벌특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민 대다수인 노동자의 삶을 팔아먹었으니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다.

성난 함성은 행사장을 둘러싼 폴리스 라인을 넘어 청와대로 향했고, 오후 늦게 인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차 범국민 촛불집회의 시발점이 됐다. 한국노총(위원장 김동만)이 이날 ‘박근혜 정권 퇴진! 노동탄압 분쇄!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정권-재벌 '검은 뒷거래'에 분노한 노동자들

대회 시작 시간을 전후해 수백 개의 노조 깃발이 서울광장에 들어찼다. 비교적 따뜻한 날씨 탓에 참가자들은 얇은 겉옷에 투쟁조끼를 걸쳤다. 많은 노동자들이 투쟁 조끼 등면에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몸자보를 부착했다.

충북 청주에서 전선 만드는 일을 한다는 한 노동자는 “매년 노동자대회에 참여하는데 예년보다 동료들이 많이 올라왔다”며 “노동자대회가 끝나면 저녁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가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칠 것”이라고 말했다.

대회는 노조 깃발 입장으로 시작됐다. 이어 대회 취지를 함축해 보여 주는 영상이 대형 스크린을 메웠다. 교차 편집된 영상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박병원 한국경총 회장은 “성과연봉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주고받았다.

김동만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박근혜 정권이 노동계가 그토록 결사반대하는 5대 노동악법과 2대 지침, 공공기관 해고연봉제를 왜 강행했는지 그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통해 수천억원을 챙기고 대기업에게 자유로운 해고, 파견 확대 등 규제 완화, 재벌 감세, 총수 사면·복권 등을 팔아먹는 희대의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쟁취한 민주공화국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분노한 100만 촛불이 박근혜 즉각 하야 목소리를 높이며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며 “오늘을 기점으로 100만 조합원의 투쟁 의지를 모아, 한국노총이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국민 대항쟁의 선봉에 설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연대사에서 “전국 농민들이 지난 15일부터 농기계를 끌고 서울로 올라오고 있다”며 “노동자·농민·학생과 시민이 연대해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 가자”고 호소했다.

"노동자 개돼지 취급, 심판하자"

참가자들은 대회 중간중간에 “불법지침 강행하는 박근혜는 퇴진하라” 혹은 “민주질서 유린하는 박근혜는 퇴진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국노총 노래패 '시대유감'과 노동가수연합팀, 금속노련 안산지역연합율동패가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야 3당 대표와 유력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대회에 참석해 노동자들과 함께 노래와 구호를 외쳤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노동개악의 실체가 재벌 대기업과 최순실·박근혜의 검은 뒷거래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다"며 "최순실표 노동개악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막아 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노사가 합의하지 않는 불법·강압적 성과연봉제는 분명코 거부한다”며 “국정농단의 부두목쯤 되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도 반드시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박근혜 정권이 개돼지 취급하고 탄압한 노동자들이야말로 정권 퇴진을 외치고 심판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며 “26일까지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헌법의 이름으로 탄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원순 시장은 “최저임금 인상에 그토록 인색하던 재벌이 최순실·박근혜에 수십억원을 바치고 특혜를 받았다”며 “앞으로 들어설 정부는 친노동 정부여야 하고, 노동자를 장관으로 뽑아 노동탄압부가 아닌 진짜 노동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자·시민 힘 모아 '노동탄압' 펼침막 찢어

행사 도중 무대 아래에 검은 도포를 두른 저승사자(?)가 등장했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박근혜·최순실 등의 명찰을 단 사람들을 포승줄에 묶어 저승으로 끌고 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여기저기에서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노리유키 스즈키 국제노총 아시아태평양지역(ITUC-AP) 사무총장은 “한국 노동자들이 개별해고 요건 완화와 성과연봉제에 대한 불법적 강요에 힘차게 맞서 싸우고 있다”며 “오늘 노동자대회는 노동개악과 분열세력에 대항해 사회정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ITUC-AP는 한국노총의 용기 있는 투쟁에 끝까지 동참할 것”이라고 응원했다.

노동자들은 투쟁결의문을 채택했다.

참가자들은 “쉬운 해고, 평생비정규직이 결국엔 비선실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재벌로부터 청부를 받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국민·노동자가 주인이다”고 외쳤다.

이날 대회는 예정한 시간보다 30분 늦은 오후 3시께 마무리됐다. 참가자들은 세종대로를 따라 4차 촛불집회에 앞서 사전행사가 열리고 있던 광화문광장으로 행진했다. 경남 창원에서 10년째 노동자대회에 함께하고 있다는 오아무개(43)씨는 “2대 지침 강행 등으로 박근혜 정권이 재벌들에게 국민과 노동자들을 팔아먹으려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며 “촛불 들고 끝까지 박근혜 퇴진을 외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노동자·시민 한마당 행사’가 열렸다. 노동자와 시민은 힘을 합쳐 행사 도중 머리 위를 덮은 대형 펼침막을 찢었다. 가로 20미터, 세로 35미터의 천 위에는 “재벌특혜 노동탄압, 박근혜 퇴진”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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