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공무원U신문의 기자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2016년 3월2일 이후 그가 쓰는 기사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자신이 속한 공무원노조 서울시청지부 총회 준비를 위해 오토바이로 출근하던 길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노조간부. 그 누구보다 민주노조를 사랑한 안현호 기자.

노동자적 관점에서 글을 쓰고, 90만 공무원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노동조합 조직활동을 하고, 두 번째 해고로 복직을 위해 12년을 싸운 공무원노조 해고자 안현호.

그가 먼 길을 떠나던 날 14만 공무원노조가 울었다. 안현호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90년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94년부터 과천에서 근무하며 김은환 현 과천지부장 등과 2001년 과천공무원직장협의회 설립에 앞장섰다. 이듬해 과천시지부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서울시청으로 옮긴 다음에도 대협부장으로 변함없이 활동을 이어 갔다. 2003년 1월 공무원노조특별법 관련 행정자치부 장관실 점거투쟁으로 첫 번째 해직됐다가 같은해 7월 복직했다.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의 불합리한 시정 항의투쟁으로 두 번째로 해직됐다. 해직공무원 안현호는 공무원노조 법규국장과 취재1국장·교육국장·편집국장·영상제작국장을 역임했다. 2011년 1월부터 공무원U신문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는 서울시청지부 사무차장(재정부장)으로 일했다.

필자와는 해고자 투쟁 현장에서 만나 끈끈한 동지애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연대 현장에서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 같은 믿음을 주는 사람. 안현호는 그런 듬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2014년 5월24일 ‘세월호 참사 범국민 촛불행진’ 당시 영상취재를 하던 중 경찰에 연행돼 "편향된 기사를 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기소됐다.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언론인에게 재갈을 물려 취재활동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보복성 조치였다. 안현호는 구치소에서 언론탄압에 항의하며 단식을 했다. 결국 60여일의 옥고를 치르고 세월호 참사 100일째 되던 7월24일 석방됐다. 출소는 했지만 단식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개인적 고통을 감내하며 치열하게 활동하는 동안 10명으로 출발한 서울시청지부 조합원수가 지난해 연말 2천명에 이르렀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3천명을 목표로 조직하자"고 주변을 독려했다.

필자가 지난해 서울시청지부 노조간부 교육을 갔을 때 "확대되는 조직의 기운이 넘치더라"는 덕담을 건네자 안현호는 씨익 웃으며 "노조간부들이 다들 열심히 한 덕이죠"라고 말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투쟁 현장에 늘 카메라와 캠코더를 들고 묵묵히 현장을 지킨 안현호. 그가 훌쩍 떠난 것이 너무나 아프고 빈자리가 큰 것은 그런 치열함과 겸손함 때문이리라.

김정수 공무원서울회복투 위원장(전해투 감사)이 필자에게 "모란공원에 안장했으면 좋겠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3일 열린 추도제에서 이런 추도사를 남겼다.

“안현호 동지는 화려한 직책은 없었지만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줬다. 강하고 끈질긴 투쟁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떠났다. 그가 못다 이룬 원직복직의 꿈과 노동해방·인간해방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애통한 부음을 접한 필자는 밤늦은 시간까지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했고 답을 받았다. 땅이 얼어 오전부터 묘소 작업을 해야 이튿날 안장이 가능하다는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부터 안현호의 죽음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장례식장에는 김주업 공무원노조 위원장과 간부, 조합원들의 조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시청별관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김경용 서울시청지부장은 "안현호는 모두가 절망의 벽이라고 고개를 떨굴 때 꿋꿋하게 오르는 담쟁이 같은 사람이었다"며 "시청지부를 제1노조로 만들어 영전에 바치겠다"고 오열하며 각오를 밝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딸의 마지막 편지는 영결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안현호는 3월4일 공무원노조 진군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안타까운 흐느낌과 “안현호 잘가라”라는 동지들의 서러운 외침을 남기고 자신이 사랑했던 노동조합을 떠나 모란공원에 누웠다. 공무원노조 차봉천 초대위원장과 이웃이 됐다.

정론직필을 실천하며 감옥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안현호 기자. 해고자로서 투쟁 현장을 치열하게 사수하며 현장을 조직했던 활동가. 민주노조운동이 잊지 말아야 할 안현호.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남긴다.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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