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른바 '공정인사 지침'이라는 제목의 일반해고 지침을 발표하기도 전에 기업들이 노조에 저성과자 해고를 담은 단체협약을 체결하자고 압박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22일 발표한 공정인사(일반해고) 지침에서 "해고가 정당하려면 엄격한 기준과 절차를 갖춰야 한다"며 "근로자 대표가 참여해 평가기준을 마련할 경우 공정한 평가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24일 서비스연맹에 따르면 한강유람선을 운영·관리하는 이랜드크루즈는 최근 저성과자를 대기발령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안을 노조에 제시했다. 회사는 노조에 장기간 보직이 결정되지 않은 직원, 직무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직원, 인사고과에서 2회 이상 하위 10%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은 직원을 대기발령 대상에 포함시키자고 요구했다. 단협상 대기발령 사유를 크게 넓힌 것이다. 기존 단협에는 징계·부정행위·보건위생상 문제가 있는 경우에 한해 대기발령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요구한 단협안은 정부가 내놓은 저성과자 일반해고 사유와 비슷하다. 대기발령 중 임금은 휴업수당만 받을 수 있다.

이랜드크루즈노조 관계자는 "명확한 사유 없이 관리자들의 임의적인 판단만으로 대기발령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며 "대기발령 대상이 되면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해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상 쉬운 해고나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에 대한 표적 전환배치 논란을 샀던 세종호텔은 최근 과반수노조인 회사노조와 임금 결정권한을 사실상 회사에 주는 단협을 체결했다. 예컨대 회사는 단협에 따라 임금을 30% 증감하는 권한을 갖는다. 월 52시간 이상 연장근로를 해야만 연장근로수당을 받는 내용도 단협에 들어갔다.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세종호텔노조는 "기존 업무와 관련이 없는 부서로 전환배치해 사직을 강요하던 사측이 앞으로 임금결정권까지 휘두를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련의 조치가 노동자를 손쉽게 관리·해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탓이다. 노조 관계자는 "임금이 30% 삭감되고도 일을 계속할 노동자들이 있겠느냐"며 "회사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임금을 깎고 종국에는 해고도 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는 정부가 사용자들의 이 같은 행태를 조장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성종 서비스연맹 정책실장은 "근기법에 쉬운 해고가 도입되지 않았는데도 기업들이 불법논란을 일으킬 여지가 큰 구조조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사용자들이 쉬운 해고·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완화를 추진하는 정부를 제 편으로 삼아 노사관계를 파탄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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