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혁명’이라는 단어가 부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1월6일자 <경향신문> 정동칼럼에는 “시민적 보편성의 혁명을 꿈꾸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1월12일자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에는 “한 나라의 시장경제와 자유기업을 ‘비윤리적인 경제인’들이 휩쓸 때는 당연히 체제가 흔들린다. 혁명도 날 수 있다”고 씌어 있다. 지난해 11월 한 여고생이 1인 시위를 하며 토해 낸 “사회구조와 모순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뿐이다”라는 말이 이런 현상을 촉발했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상품과 자본에 필요한 생산·판매·경영 문제와 관련해서는 금기가 아닐지라도 인간에 필요한 정치·사회·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해서는 금기 단어였던 게 사실이다. 특히 1990년 전후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역사는 끝났다”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공세가 기승을 부렸고, 이런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와 혁명은 정치권과 언론에서 시대착오적 이념으로 배제돼 왔다.

부르주아 계급은 왜 혁명을 그토록 싫어하는가. 부르주아 계급이 역사적으로 상승하던 시기에는 그들도 혁명을 선호했다. 그들이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변혁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혁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계급 자리를 굳힌 이후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인이 되고자 혁명을 꿈꾸게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노동계급이 혁명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부르주아 계급은 철저히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다. 부르주아 계급의 기관지인 <조선일보>의 앞서 말한 칼럼이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면 <경향신문> 칼럼은 긍정적인 입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 비록 노동대중의 계급적 자각이 높아지고 있는 현 정세에서 그것을 무디게 하는 부르주아적인 보편성의 시민의식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지만 말이다.

지금 조성된 정세는 극히 위기적이다. 세계경제 대불황이 십 년째 장기화하는 가운데 또 한 번의 큰 추락이 예고돼 있다. 그 와중에 자본은 가치증식과 축적을 원활하게 이루지 못해 파산에 직면해 있다. 노동계급은 고용과 임금을 적절하게 제공받지 못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계급이든 노동계급이든 현재 상황을 타파하고 싶어 한다. 단순화하면 자본측은 파시즘으로의 역진을 기도하고, 노동측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혁명으로의 전진을 지향한다. 새해 들어 박근혜 정권은 안으로는 정계개편을 통해 정치지형을 보수·수구 대연합으로 가져가는 동시에 이 연합된 힘을 바탕으로 개헌을 통해 정치체제를 파시즘으로 제도화하려 하고 있다. 밖으로는 한일 군사동맹 체제 이행을 노골화하고 동북아전쟁 상황을 조성하려 한다.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국 압력을 받아들이고 일본에 굴복한 것은 그 첫걸음이다.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고고도 미사일 방어시스템(사드·THAAD) 배치가 그 다음 걸음으로 일정에 올라 있다. 반면 노동계급측에서는 ‘노동시장 구조개악’ 반대투쟁에서 보듯이 기득권을 가진 독점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데 비해, 이렇다 할 보장을 받지 못해 온 중소·영세·비정규·여성 노동자들, 특히 청년노동자들은 생각과 행동에서 급진화하고 있다. 이는 비단 한국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청년노동자들이 정치혁명을 주창하는 민주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후보를 적극 지지해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샌더스는 예비선거가 가장 먼저 이뤄지는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주 여론조사에서 유력한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앞지르고 있다.

이런 혁명적 흐름에 대해 한국 지배계급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중앙일보> 장하성 칼럼에서는 “헬조선의 깨달음을 세상을 바꾸는 행동으로 이어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고 있다. 4월 총선과 내년 대선이다. 정치 말고는 세상을 바꿀 방법이 없다. 한 번의 투표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2030세대가 헬조선의 현실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고 투표에 참여한다면 세상은 바뀐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박정훈 칼럼에서도 “세상을 바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거다. 오는 4월 총선이 좋은 기회다. 청년단체들이 연대해서 세대 차원의 요구 사항을 내건다면 파장이 클 것이다. (…) 4년 전 19대 총선 때 20·30대 투표율은 45%에 불과했다. 당시 청년당도 창당해 관심을 끌었지만 득표율 0.3%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 청년당이 4년 전엔 실패했지만 이번 총선에 한 번 더 도전하기를 바란다. 흙수저들이 뭉쳐도 좋고, 어느 TV광고처럼 아르바이트 노동자 정당을 못 만들 이유도 없다. 정년당과 흙수저당, 알바당이 나와 목소리를 내야 세상이 바뀐다”고 썼다.

과연 한국에서 선거를 통한 정치혁명이 가능할까. 독점재벌이 지배하고 있는 토대의 천민성과 그 위에 얹혀 있는 정치체제의 파쇼적 장치들에 비춰 볼 때 선거를 통한 정치혁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조·중·동에서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꾸라고 마음 놓고 큰소리로 선동하는 것이다. 정치혁명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한국에서 정치혁명을 이루려면 손으로 하는 투표가 아닌 발로 하는 투표가 가장 현실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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