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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공장 파견직 이야기 ② 살아남으려면 가위바위보 이겨라] 해고자유 공화국 대한민국, 하루아침에 가정이 무너진다안산시흥 파견노동자 유준희씨
   
▲ 안산시흥 파견노동자 유준희씨

전국 제조업 파견노동자의 93%가 모여 있다는 안산시흥지역 산업단지. 한 청년노동자가 반월산단과 시화산단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며 밀리고 밀려 벼랑 끝에 선 노동자들을 직접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제조업 직접생산공정 파견은 불법이다. 기업들은 6개월짜리 단기 파견노동자를 쓰고 해고한 뒤 1~2주 간격으로 반복고용하면서 불법을 피한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의 허점인 ‘일시·간헐적 업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투명망토처럼 불법이 사라져 버린다. 생존 의지와 맞바꾼, 꼬깃꼬깃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처박을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감정 얘기를 <매일노동뉴스>가 5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① 5천580원에 팔리는 파견 신파극
② 살아남으려면 가위바위보 이겨라
③ 인격 모독에 우는 또 다른 계급 파견
④ 기업들의 꼼수, 그 끝없는 욕망
⑤ 노동자들이 움직인다


“어제 부부의 날이었다는데 다들 좋은 밤 보냈어?”

“두 번씩들 혔어, 안 혔어?”

“아고, 나는 오래하는 거 딱 질색이야. 단타로 두 번 해 부렀지.”

“기운들도 좋아. 우린 한 번 하면 몇 달은 셔터 내려야 하는데.”

오늘도 초고수 아줌마들의 19금 대화가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제조업 현장에서 일한다고 하면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파란 빛 도는 작업복을 입고 표정 없는 얼굴로 나란히 서서 현란하게 손만 움직이는 사람들과 날카로운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한 차가운 장면 말이다. 전혀 틀린 그림은 아니다. 여전히 관리자들은 ‘빨리빨리’를 외치며 라인별 수량 경쟁을 시키고, 작업 중에 대화라도 나눴다간 조용히 하라며 소리 지르기 일쑤다. 욕설에 폭력까지 쓰는 회사 소식을 간간이 기사를 통해 접해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늘 그리 우울하지만은 않다. 조장 눈을 피해 먹지 말라는 사탕을 까먹으며 낄낄거리고, 어제 본 드라마 얘기에 흥분하다 관리자들이 째려보면 눈치 보며 떠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밤 남편과의 잠자리 얘기에 밉상 짓 하는 언니 흉보기, 맛있는 밥집·술집 공유하기. 더디게만 흐르는 시간을 우린 이렇게 이겨 낸다.

늘렸다, 줄였다 고무줄 고용 희생양

그렇게 하루 작업이 마무리되면 사람들은 파김치가 돼 버린다. 그리고 축 늘어진 몸뚱이를 끌고 한곳으로 모여든다. 탈의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게시판 앞, 살생부가 붙여진 곳이다. 살생부는 다른 게 아니라 다음날 생산계획이다. 내일 계획된 작업과 작업자의 이름이 공개되고 그곳에 내 이름이 있으면 출근, 그렇지 않으면 끝을 알 수 없는 휴무의 시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놈의 회사는 100명이 일을 하는데 정직원이 20명뿐이다. 80%를 늘렸다 줄였다 반복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고나 할까. 직원들을 고무줄처럼, 때로는 자재처럼 대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인 듯했다. 바쁠 때는 80명이 출근하지만, 일이 적을 때는 5명까지도 줄인다고 했다.

잔인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처참함을 느꼈다. 아침이면 반갑게 인사하고, 점심시간이면 밥도 같이 먹으며 함께 일하던 언니·오빠들이 다음날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공장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잘만 돌아간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잘려 나가고, 누군가의 아버지가 준비 없이 직장을 잃는 것이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우주와도 같은 존재일 그 한 사람. 회사는 구태여 힘들일 필요도 없이 종이 한 장 붙여 놓고 그들의 내일을 일축한다. ‘지금부터 이곳에 네 자리는 없다. 나가라.’

가위바위보에 지는 바람에 회사에서 잘렸다는 동네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부서 인원을 감축해야 하는데 반장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을 해고하겠다고 했단다. 정상이 아니다.

“파견 주제에 할아버지 장례는 무슨”

동생이 PCB회사에서 2교대를 하던 지난해 일이다. 아버지를 일찍 잃은 우리 자매는 외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잘 따랐다. 특히 동생은 할아버지가 천식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 옆자리를 지키곤 했다. 중환자실에서 힘겹게 병마와 싸우던 할아버지는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우린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고, 동생은 3일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조장에게 연락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3일간 출근은 어렵겠다고.

그런데 대답이 황당했다. 파견직은 3일간 출근하지 않으면 자동 퇴사라는 것이다. 미리 연락을 했으니 무단결근도 아니고, 게다가 사유가 할아버지 상인데 어떻게 퇴사처리를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돌아온 말은 가관이었다. “파견직은 예비군 훈련을 가도 자동 퇴사다.”

도대체 이건 어느 나라 법일까. 진정 이곳은 치외법권 지대인가. 결국 동생은 발인도 지키지 못하고 출근을 해야 했다. 출근 후 조회시간, 사람들 보는 앞에 불려 세워져 한참을 혼났단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게 사실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믿느냐, 사망진단서라도 떼어 와서 증명해 봐라.” 이렇게.

할아버지를 장지에 모시고 집에 돌아오는 길, 수화기 너머 들리던 동생의 떨리는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무슨 이런 회사가 다 있냐고. 이런데도 계속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분하다고 서럽게 울던 그날. 우린 왜 이리 약한 것일까. 우린 이런 부당함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동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던 힘없는 내 자신이 그렇게 원망스럽던 날이 없었다.

“정직원 되려면…” 끈적해진 회식자리

파견직의 삶이 이 정도에 이르다 보니, 사람들은 정직원 자리를 얻어 내려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한 제약회사 파견직으로 있을 때 얘기다. 회식하는 날이었다. 고기 먹을 생각에, 나같이 하찮은 파견직도 데려가 준다는 말에 신이 나 있던 날. 정직원 언니들은 묘책이라도 알려 주는 듯 얘기했다. 회식 가면 최대한 사장 옆에 앉아 술도 따라 주고, 한 잔 주거든 잘 받아먹으라는 것이다. 눈에 한 번이라도 더 띄어야 정직원 시켜 주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에이,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어’라며 흘려들었으나, 실제로 다른 파견 언니들은 사장님 옆에 앉아 술 따라 주기 바빴다.

2차로 이동하는 중 사장이 화장실에 가자, 언니들은 또 조언을 해 줬다. 화장실 앞에 서 있다가 같이 들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언니들이 하도 열심이니 불안하기는 했으나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아직 그만큼 절실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 정말 절실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잘 모르겠다. 틈만 나면 사장님 옆자리로 가려는 언니들, 온갖 아양과 눈웃음, 그리고 터치가 만연했다. 2차로 이동한 노래방에서 분위기는 한층 더 끈적해졌다. 즐거운 회식자리가 또 하나의 전쟁터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장은 평소에도 손버릇이 나쁘기로 유명했다. 작업 현장에서도 터치를 했고, 회식 자리에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이 조장은 요만하고, 저 조장은 저만하고.” 손 모양을 해 가며 이렇게 떠들고 다니던 사장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본인 같이 사원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장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사장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얻고자 성적인 접대를 해야 하는 분위기가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참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그저 나의 초라함을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너무나 척박한 생활의 토양

안정된 직장을 갖는다는 건, 미우나 고우나 날이 밝으면 갈 곳이 있다는 것이다. 집이 아닌 곳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이고. 규칙적으로 생활비가 입금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면 정년까지 그런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며,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위해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는다. 이 회사를 다니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만큼 안정된 직장은 모든 생활의 시작으로, 토양과도 같은 것이다.

내 토양은 너무도 척박하다. 돌멩이투성이에, 지난해 철거한 비닐하우스의 잔해가 썩고 있다. 10개의 씨앗을 뿌려도 몇 포기의 배추를 얻을지 알 수가 없다.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까. 자재가 없다며 또 쉬라고 하지는 않을까 불안이 습관이 된 요즘이다.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업체가 지천이다. 파견직 하나 해고하는 데엔, 1분의 수고도 필요치 않다. 말 한마디에, 전화 한 통에, 심지어 메시지 한 통이면 충분한 것이 파견직 해고다.

그 1분의 값어치도 못하는 직장 덕에 자존감은 매일매일 잊지 않고 붕괴된다. 그리하여 오늘도 소주 한 잔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일을 내일에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중얼거리며 비틀비틀 집으로 들어가는 길, 내일은 출근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사 충만한 밤이다.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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