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31세)는 대학 졸업 후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6개월 동안 구직을 하다 의약품 납품회사의 마케팅부서에 입사했다. 당초 공지된 연봉은 2천400만~2천800만원이었지만 회사는 입사 뒤에 2천만원이라고 말을 바꿨고, 추가수당이 연봉에 포함돼 있다며 야근수당도 주지 않았다. 긴 구직활동 끝에 입사한 A씨는 이를 참았지만, 상사는 "왜 주말에 출근을 안 하느냐, 내가 너 같은 (낮은)학력이면 더 미친듯이 일할 것"이라며 수시로 모욕했다. 결국 그는 4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 A씨는 3개월 뒤 정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말에 홍보대행사 인턴으로 취업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를 3주 만에 해고했고, 급여로 달랑 14만원을 입금했다. 현재 A씨는 학원에서 온라인 카페를 24시간 운영·관리하는 일을 한다. 주마다 하루는 반드시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했고 주말에도 6시간씩 일했다. 그래도 대체휴무나 추가수당은 없었다. 학원은 정해진 연차도 성수기라거나 매출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못 쓰게 했다.

◇52시간 넘는 노동, 연장수당은 남 얘기= 이런 일은 비단 A씨만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청년유니온이 25일 오전 토론회에서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날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청년의 삶을 파괴하는 블랙기업 진단과 해법 토론회에서는 A씨를 포함한 청년들의 심층면접 결과와 블랙기업 온라인 제보사례도 발표됐다.

이에 따르면 청년들은 직장에서 장시간노동과 임금체불·폭언 등 괴롭힘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유니온의 블랙기업 제보사이트에 접수된 제보는 총 63건이다. 제보내용은 장시간 노동(69.8%), 연장수당 미지급(36.5%), 임금체불(31.7%), 폭언(23.8%), 근로계약서 미작성(17.5%), 정규직 희망고문(15.9%), 근로계약과 실제 근로조건의 불일치(14.3%) 순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 결과 역시 비슷했다. 응답자들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48시간 이상이라는 답변이 54.2%로 가장 높았고, 52시간 이상도 30.6%에 달했다. 40시간 미만이라는 응답은 15.2%에 그쳤다. 이처럼 장시간 근무가 빈번한 가장 큰 이유는 업무량 과중이(41.1%)이었다. 그런데 절반이 넘는 52.6%가 초과근무에 대한 시간외수당이나 대체휴무 같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응답자 중 22%인 67명이 해고를 겪었는데 이들 중 52명(77.6%)이 부당해고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폭언·모욕 등 직장내 괴롭힘을 당했다는 응답도 28.1%로 나타났다.

◇폭언·모욕은 부지기수, 혼자 삭혀=응답자의 62.9%가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업무, 복지혜택 사용 불가 압력, 자진퇴사 종용 등의 부당한 경험을 1회 이상 겪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응답자의 65.9%가 인권침해나 부당한 대우, 불이익이 발생해도 혼자 삭히거나 동료와 푸념만 하고 넘어간다고 답했다. 제대로 해결이 안 되리라는 생각(33.7%)과 해고 등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24.1%) 때문이었다. 실제 수당을 못 받아 문제제기를 한 26명 중 17명(65.4%)이 문제제기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8명(30.8%)은 오히려 불이익을 당했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실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취업이 절박한 청년에 대한 기업의 착취는 열정페이,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고착화하는 포괄임금제, 실적압박과 폭언·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개인이 아닌 구조 문제로 보고 맞서는 것이 블랙기업 운동의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블랙기업 문제의 해법으로 노동시장 규제 입법과 노조 차원의 대응, 조직문화 개선, 근로감독과 처벌 강화라는 사회적 규제를 지목했다. 특히 청년유니온은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창조산업' 부문을 주목할 방침이다. 패션업계 열정페이 사례에서 보듯 노조가 없고 노동시장 규율도 없는 산업부문에서 문제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청년들이 착취해도 좋으니 취업만 시켜 달라는 양상이 되고 모든 부문에서 노동법 위반이 일어나고 있다"며 "청년 당사자들이 노동지표를 처음 제시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표를 보다 구체화해 '블랙기업 지도'를 만들고 과도기 노동 보호를 위한 고용형태 공시나 취업규칙을 별도로 공표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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