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
(변호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했던 비정규 여성노동자의 자살사건이 큰 반향을 불러오고 있다. 정규직 전환 약속을 믿고 갖은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견뎌 왔는데 전환시점에 이르자 사측은 “그런 일이 없다”며 발을 뺐다. 여성노동자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까지 결심했다는 것이 그동안 알려진 내용이다.

최근에는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중기중앙회 규정상 해당 여성노동자는 애초부터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고 한다. 중기중앙회 ‘2014년 하반기 임시직 활용 승인 여부 통보’ 문건에는 "계약직 근로자의 누적 근로계약기간은 2년 초과 불가"라고 돼 있었다. 돌이켜 보면 회사는 약속할 수 없는 내용을 내걸었고 망인은 이런 내용조차 모르고 안타까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른바 ‘비정규 노동자’라는 말은 법률상 정의가 내려진 일이 없다. 우리 사회 노동현장에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등장한 지 벌써 15년이 넘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고 수많은 노동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정작 그 시발이 돼야 할 제대로 된 용어조차 법률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겪는 노동자’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간제·단시간·파견·특수고용·위장도급 등으로 구분된다.

흔히 “노동에 관한 입법을 담당하는 자는 부지런해야 한다”고 한다. 그만큼 노동환경이 급변하고 있으므로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입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바로 현실적으로 규범력을 갖는 제도가 절실하다는 얘기다. 입법자는 사용자의 순발력을 따라잡을 능력과 의지를 겸비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입법부·행정부)은 어떤가. 처음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했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위한 법 제정을 위해 입법을 촉구했다. 주장이 나온 지 10여년 가까이 흐른 2006년 기간제법이 제정되고 파견법이 개정됐다. 일부 공기업과 대기업에서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노력도 보였다. 잠깐이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때늦은, 그것도 비정규 노동자 보호에는 턱없이 부족한 법이었다. 대부분 사업장에서는 법을 교묘히 피하기 위한 방법만을 찾았다. 기간제법을 보자. 비정규 노동자들을 무늬만 바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 버렸다. 영원히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일부 내용 면에서는 기존 법원이 보호했던 범위를 크게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수회 또는 계약갱신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정규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기대 유무에 따라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인정해 주던 기존 판례는 기간제법 시행으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기간제법은 비정규 노동자를 사용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2년 미만의 기간제 노동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줘 버렸다. 앞서 소개한 중기중앙회의 내부 지침이 대표적이다. 계약기간을 수없이 쪼갠다면 2년을 넘겨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간제법 시행 후 8년여가 지난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현실은 어떤가. 기간제·파견과 같은 고전이 돼 버린 비정규 노동자들을 넘어 현재 존재하는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운 또 다른 변종 ‘비정규직’이 수시로 생겨나고 있다. 또 다른 변종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는 많은 노동자들의 생활은 악화일로에 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비정규 노동자가 600만명을 넘겼다고 한다. 지난해보다 13만여명 증가했고 임금격차는 더 벌어졌다고 한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통계 정도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노동계가 바라보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현실은 이보다 암울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를 적재적소에서 규제할 수 있는 규범력을 갖는 법률은 찾기 어렵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제도개선과 새로운 입법을 기다리기 어려운 현실이다. 법원에서 위장도급이자 불법파견이라고 확정까지 해 준 내용조차 입법화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입법자들이 직무유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능한 것인지 둘 중 하나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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