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20일 “재도약이냐 쇠락이냐 골든타임에 놓인 한국경제 환골탈태의 핵심열쇠는 규제개혁에 있다”며 경제패러다임 선진화를 위한 5대 규제개혁과제 건의문을 청와대·국무조정실·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에 제출했다.

5대 규제개혁과제는 신사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인프라, 신사업의 블랙홀인 회색규제, 경제현장과 동떨어진 탁상규제, 우물 안 개구리 규제, 국제경쟁력 약화요인인 성역규제라고 한다. 특히 대한상의가 주장하는 ‘국제경쟁력 약화 요인인 성역규제’는 바로 노동부문 규제다. 대한상의는 “파견업종 제한, 파업시 사업장 점거 허용 및 대체근로제한 등 선진국에 없는 각종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4년에 제정된 국제노동기구(ILO) ‘필라델피아 선언’의 첫 번째 장은 “노동력은 상품이 아니다”는 조항으로 시작하고 있다. 함부로 노동자들을 사고파는 간접고용을 금지하는 항목이다. 이어 “모든 인간은 자유 및 존엄과 경제적 안정과 기회균등의 조건하에 물질적 복지 및 정신적 안정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 상태의 실현은 국가적·국제적 정책 및 조치의 중심목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ILO의 부속서다. 한국 정부는 ILO 가입국으로서 이 내용을 지킬 의무가 있다.

61년에 제정된 직업안정법은 51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의 강제노동 금지 및 중간착취 금지를 원칙으로, 노동자의 직업안정을 도모하고 실업대책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98년 시행된 파견법은 이런 직업안정법 원칙의 예외조항으로 등장했다. "고소득 전문직업인들은 한 회사에 매어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업들이 파견법 도입을 주장한 주된 근거였다.

하지만 이것은 눈속임이었고 실제로는 운전직·사무보조·간병인 등 가장 열악한 조건의 업종이 파견허용 대상이 됐다. 당시에도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합법파견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간접고용이 늘어날 것이며, 기업들이 파견허용업종 확대를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그 예측은 불행하게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간접고용은 확대되고 파견허용업종도 계속 확대됐다.

한국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삶은 노동자들이 존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대한상의가 파견허용업종 확대를 요구하면서 내세운 근거는 제조업의 노동비용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비용절감을 위해 간접고용을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원청이 파견을 통해 비용을 줄이고, 게다가 파견업체가 7~20%의 비용을 수수료로 떼어 가고 나면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임금이 얼마나 줄어들겠는가.

이미 노동자의 실질임금상승률은 0.2%대고, 비정규직의 실질임금은 마이너스 상승률이다. 전체 소득에서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인 노동소득분배율은 70%대가 정상인데, 한국 500대 기업의 노동소득분배율은 53.7%밖에 안 된다. 전체적으로도 60% 선이 무너져 있다.

정부가 노동자들의 삶의 안정을 도모하는 대신 기업의 이윤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온 결과다. 비정규직을 계속 늘려 왔고 불법적인 간접고용을 묵인해 왔으며,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단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아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기업들을 살찌우고 권력을 강화시키다 보니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쥐어짤 수 있는 데까지 쥐어짜려고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전체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파업의 권한도 무력화하자는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기업들이 노예제도를 부활하자고 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규제완화는 ‘선’이 아니다. 기업이 잘된다고 해서 노동자가 잘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정책과 기업들의 행태가 명확하게 보여 줬다. 규제완화로 인한 피해는 노동자들과 전 국민이 나눠 부담했다. 세월호 참사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최고라는 산재사망사고에서 보듯이 안전규제 완화로 인해 안타까운 목숨들이 사라졌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완화로 골목상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부동산 규제완화로 노동자들은 높은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 빚을 내야 했다. 대기업들은 규제완화의 성과를 누리면서 무려 762조원의 사내유보금을 쌓아 두고 있다. 투자유도 운운하지만 최경환 경제팀은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는 전혀 진전시키고 못하고 있다. 대한상의의 이번 건의문은 그런 탐욕의 결정판이다. 그런데 정부는 또다시 건의문에 화답할 듯하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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