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제 전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장 등 법원의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하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법원 판결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18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562호 법정.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수많은 언론을 앞에 두고 재판부는 3분 정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판결문의 주문을 읽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사건 원고들은 모두 피고인 현대자동차 주식회사와 근로자파견관계에 있다고 인정됩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동자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대법원이 최병승씨 건에 대해 불법파견 판결을 내린 지 4년, 고용노동부가 현대차 전체 공정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내린 지 10년 만의 결론이다.

◇10년 걸려 '같은 결론'=현대차에서 사내하청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비정규직노조가 결성되면서부터다.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가 연차휴가를 쓰려고 휴가원을 제출했다가 이것이 빌미가 돼 신원미상의 사람들로부터 ‘식칼테러’를 당한 사건이 계기가 돼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듬해 노조가 제기한 불법파견 진정에서 노동부가 울산공장 101개 업체, 아산공장 8개 업체, 전주공장 12개 업체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리면서 현대차의 불법적인 고용관행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노동부 판정과 이날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은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

2010년과 2012년 대법원으로부터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최병승씨가 속했던 자동차 조립(의장)공정뿐만 아니라, 자동차의 골격을 이루는 차체(프레임) 조립공정, 자동차에 색을 입히는 도장공정, 엔진이나 변속기 같은 부품 제조공정, 수출을 위한 반조립제품(CKD) 제조공정, 자동차 출고 전 검사공정(PDI) 등 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가 투입되는 전체 공정에 불법파견이 사용됐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이다.

그동안 현대차는 최병승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개별 케이스에 불과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는데, 10년 전 노동부 판정과 이날 법원 판결 모두 현대차와 하청노동자 사이의 직접고용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파견이냐 도급이냐를 구분하는 핵심 지표인 ‘노동자들에 누가 지휘·명령권을 행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재판부는 “하청업체들은 아무런 권한이 없고 현대차가 사용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해 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제조업 불법파견 소송에 영향=재판부의 이 같은 판단은 앞으로 줄줄이 선고가 예정된 완성차업체 사내하청 노동자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재 금속노조 사업장 가운데 현대차·기아차·한국지엠·쌍용차 등 4개 완성차업체와 포스코·하이스코 등 제철업체에서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한국지엠은 이미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았다. 쌍용차 역시 1심에서 불법파견을 인정받고 2심을 기다리는 중이다. 기아차는 다음주에 1심 선고가 예정돼 있는데 이날 나온 현대차 판결의 영향을 크게 받을 전망이다.

사실상 국내 완성차업체에 불법파견 관행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 법원에 의해 속속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김태욱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업체나 업종별로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대기업들이 상시·지속 업무에 불법파견 인력을 투입해 부당하게 이윤을 챙겨 왔다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며 "이번 판결이 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서울중앙지법의 판결과 관련한 정부의 대응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노동부는 2004년 현대차 공정 전반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내리고도, 지난 10년간 재벌기업인 현대차가 현행법을 어기고 불법적인 고용관행을 유지한 것에 대해 눈을 감았다. 그러는 사이 불법파견과 같은 변종의 고용형태는 IT업종과 전자업종, 서비스업종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특히 지난해 10월 노동부가 내놓은 삼성전자서비스에 대한 적법도급 판정은 노동부가 과연 간접고용 문제에 대한 해결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했다. 노동부는 삼성전자서비스 위장도급·불법파견 논란에 대해 “근로자파견의 판단기준에 관한 지침에 따라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위장도급이나 불법파견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며 “논란은 있지만 불법은 아니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도급과 파견에 대한 구닥다리 잣대에 집착해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부는 최근 ‘근로자영자’ 논란이 제기된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고객서비스센터에 대한 근로감독 결과 발표를 특별한 이유 없이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날 성명을 내고 “오늘 법원의 판결은 비단 현대차 사내하청 당사자에게만 해당하지 않음을 정부와 재계는 알아야 한다”며 “이와 유사한 사내하청 및 간접고용 사례에 대해 정부는 정규직화 정책으로 화답해야 하고, 기업들 역시 직접고용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 비정상적인 고용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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