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임금근로자 10명 중 9명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본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에도 추가임금청구권을 행사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노동부는 23일 발표한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에서 “노사가 새로운 임금협약을 체결할 때까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근로자들의 추가임금청구권 행사가 제한된다”고 밝혔다. 현행 임금협약이 만료될 때까지는 소송에 나설 수 없다는 뜻이다.

◇신의칙의 무한 확장=이날 나온 지침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해설이 담겨 있다. 근로감독관들은 이를 기준으로 일선 기업 노사의 임금·단체협상을 지도하게 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신의칙 적용시점과 고정성에 대한 노동부의 해석이다.

임무송 근로개선정책관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신의칙이 ‘이 판결 이후 합의’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며 “임협 만료 때까지냐 단협 만료 때까지냐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기업들이 매년 총액을 기준으로 임금을 결정해 온 관행에 따라 임협 만료시점까지 신의칙이 적용된다고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 다음달인 지난해 12월19일부터 신의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노동계의 주장과 상충한다. 단협에 임금 관련 조항을 명시한 사업장은 임협이 아닌 단협 만료일까지 신의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경영계의 주장과도 다소 차이가 있다.

임협·단협 만료시점을 둘러싼 이 같은 해석은 어디까지나 노조가 설립돼 있는 사업장에 한정돼 적용된다. 2012년 기준 우리나라 노조조직률은 10.3%에 불과하다. 전체 근로자 10명 중 9명은 임·단협을 적용받지 않고 취업규칙이나 기업관행의 규율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임금협정이나 단체협약과 달리 취업규칙과 기업관행에는 만료시점이 없다. 현행 합의가 만료된 뒤부터 임금청구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노동부의 해석은 우리나라 근로자 절대 다수의 임금청구권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료시점이 없으므로 신의칙 적용시점이 ‘사장 마음대로’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

유성규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참터)는 “본래 신의칙이라 함은 ‘뒤통수 때리지 말라’는 의미로,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노사의 신뢰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들고나온 개념”이라며 “노동부의 해석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한 근로조건과 규율을 묵묵히 따랐을 뿐인 대다수 노동자를 노사협상의 당사자로 상정하면서, 정작 이들의 임금청구권은 보호하지 못하는 모순된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근로자를 신의칙에서 해방시켜 줄 ‘착한 사장’이 나타나지 않는 한 임금청구권을 보호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임무송 근로개선정책관은 “묵시적 합의나 관행을 따르는 기업의 경우 협약 만료일이 없기 때문에 사업장마다 정기적으로 임금을 조정하는 시기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노조 사업장을 관할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근로감독관들이 취업규칙과 관행의 규율을 받는 사업장의 임금조정까지 지도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도지침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노사 힘겨루기 본격화, 지침 실효성은 '글쎄'=노동부는 이날 발표한 지침에서 통상임금의 요건인 정기성·일률성·고정성 가운데 고정성 판단기준을 명확히 했다.

노동부는 지침에서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초과근로를 제공하는 시점에서 봤을 때, 그 근로자가 특정 시점에 재직하고 있을지 여부가 불확실하므로 고정성이 없다”며 “정기성 요건을 충족한 정기상여금 중에서도 그 지급요건이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 한정’할 경우에는 고정성이 없으므로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고 밝혔다. 임금항목에 ‘재직요건’이 명시돼 있다면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부의 이러한 판단은 노동시장에 왜곡될 신호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사용자들은 벌써부터 올해 임단협 필승카드로 ‘재직요건 최대 확보’를 꼽고 있다. 이에 맞서 노동계는 대법원 판결이 고정성의 지표로 본 ‘퇴직자 일할지급’ 문구를 최대한 많이 넣기 위해 골몰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노사의 힘겨루기에서 누구의 힘이 더 세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노동부의 지침이 일선 현장에서 효력을 발휘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이번 지침은 노동부가 개정을 유예한 통상임금 산정지침(노동부예규 제476호)과 달리 형사처벌 기준도 되지 못한다. 김기덕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재직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을 무조건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라는 뜻이 아니라 임금의 실질을 정확하게 따져 판단하라는 것”이라며 “구체성이 없는 노동부 지침이 노동시장에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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