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
노동센터
소장

‘슈퍼갑’과 ‘꼴갑’에 대한 전쟁이 한창이다. 라면 상무·빵 회장·조폭 우유에 이어 윤창중 사태까지 한국사회 부동의 기득권자로 군림해 왔던 갑들이 때 아닌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대로라면 지난해 양대 선거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핵심 화두로 앞다퉈 다뤘지만 박근혜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잦아든 경제민주화 논의가 다시 불붙을 기세다. 을들의 각성과 자발적인 저항이 어느 때보다 거센 이때, 한 번의 이벤트나 이슈 파이팅으로 그치지 않고 제대로 된 경제민주화 논의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갑의 횡포’에 대한 유례없는 사회적 분노는 일시적 현상일 뿐일까, 아니면 지속적 현상으로 이어질까. 이런 사회적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역진불가로 치달아 온 빈부격차와 구조적 차별로 인해 점증해 온 상대적 박탈감이 임계점에 도달한 것일까. 갑의 전유물처럼 용인돼 온 부정의와 꼴같잖은 금권주의에 대한 서민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것일까.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접하면 그 원인과 동력을 이해해야만 향후 추세를 정확하게 전망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상황 분석에 근거한 판단과 실천이 전제될 때 지금 예기치 않게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국면을 '을'을 위한 한국사회로 변화시킬 호기로 만들 수 있다.

가장 먼저 던지고 싶은 질문은 경제민주화 담론의 동력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선거 기간 최우선 사회적 의제로 강력하게 작동했던 메커니즘의 고리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정규 노동자와 함께 경제민주화 담론 확산의 주동력은 자영업자였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에서 퇴출된 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영세자영업자가 됐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인 과당경쟁으로 소득이 하락한 자영업자의 지위는 외환위기 이전 정규직 노동자보다 나은 처지에서 비정규 노동자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둘째, 2000년대 이후 대기업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진출한 분야가 유통업과 물류업인데, 노동시장을 벗어나 자영업자가 된 이들이 다시 신규 진출 분야에서 대기업과 맞닥뜨리게 됐다. 즉 자영업자들은 노동시장에서 쫓겨나고, 노동3권 보호로부터 배제돼 있는 상태에서 대기업과 경쟁하거나 가맹점 또는 대리점 형태로 대기업과 불공정한 갑을 관계를 맺게 됐다.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는 노동시장의 약자 또는 퇴출자로 노동시장 바깥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그리고 좋은 일자리가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화두로 공인받고 있는 시대 상황에서 한국사회 양극화와 불평등·불공정 심화로 고통 받고 있는 최대 규모 계층집단인 비정규직과 자영업자가 손을 맞잡는 것이 필요하고 절실한 과제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동병상련의 처지인 두 계층은 경제민주화 담론 확산의 주력부대이고 상호 시너지 효과를 주고받을 수 있는 당사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30인 미만 사업장에 밀집된 비정규 노동자의 분포를 놓고 보더라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한꺼번에 불가능하며 '비정규직-특수고용-자영업자-갑을 관계' 성격이 혼재된 상태를 인정한 조건에서 점진적 개선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하나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쉽진 않겠지만 갑을 관계를 지렛대로 비정규직 문제 개선 가능성을 현실화하고 대자본 대항력을 배가해 나간다면 중장기적으로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올해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가맹사업법 개정안(프랜차이즈법)에는 사업자단체의 결성 및 협의권 보장이란 내용이 담겨 있다. 노동조합으로 보면 노동2권을 인정받은 셈이다. 이런 기회를 계기로 기존 비정규직 조직노동과 자영업자 단체가 전략적 제휴관계를 통해 압도적 ‘갑’ 중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을’의 권익신장에 함께 나선다면, 한국사회의 올바른 변화를 선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갑을 전쟁 시기를 맞아 을의 폭넓고 강력한 연대가 한국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규정짓는 때다. 갑에 대한 을의 전투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규모로는 ‘슈퍼을’인 비정규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연대를 성사시키는 것은 올바른 경제민주화 진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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