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
연구소 이사장

제18대 대선의 격전이 끝난 자리, 승패의 원인규명과 향후 방책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다. 승자야 한껏 희망에 부풀어 정권구축에 바쁘지만 패자의 뒷수습은 산 넘어 산이다.

그런 와중에 4명이 연이어 고달픈 삶을 스스로 접었다. 그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한국외국어대 노동자, 그리고 민권연대 활동가였다. 한 사람은 해고 후 복직은 됐지만 민주노조가 무너지고 158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손해배상의 공포에 시달렸다. 또 한 사람은 크레인 고공농성을 하다가 회사 용역경비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고 구속된 후 8년간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어 왔다. 숨 막히는 노동조건과 생활고, 대선결과에 절망한 이들의 마지막 말은 이렇게 전해진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5년을 더 어떻게 살라는가. 못하겠다.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없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노동자·빈민들의 행렬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미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가족 23명이 세상을 버린 데 이어 두세 건의 자살시도가 더 있었다고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는 보고했다. 대선 보름 전에는 유성기업의 한 노동자가 우울증으로 자살했고, 자식·손자와 함께 죽음을 선택한 늙은 빈민들의 소식이 연이어 전해졌다. 그뿐인가. 짧게는 36일에서 길게는 66일, 70일째 영하 10도 이하의 살을 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철탑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자동차·유성기업·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역시 죽음 못지않은 상황에 매달려 있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요구와 투쟁은 때와 장소 구분없이 분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선을 전후한 노동자의 자결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선거에서 이기면 문제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았고 그것이 허망하게 무너진 결과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는 노동운동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 담겨져 있다. 노동운동에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한참 거리가 먼 정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운동상황에 대한 배신감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희망이다”, “노동만이 미래의 꿈”이라는 얘기는 수없이 오르내렸고 심정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힘겨운 삶과 노동운동의 현실은 시간이 흘러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했다. 총선과 대선 과정에서 노동운동 진영은 쇠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진보정당은 내부갈등과 선거부정 비리로 스스로 쪼개져 몰락했고 대선후보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위원장이 사퇴하면서까지 임원직선제 유보를 결정했다가 대의원대회의 불법성이 밝혀져 원점으로 회귀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대비책을 세운다고 하지만 불합리한 내부운영과 도덕성에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한국노총은 실리주의 경향에 실려 정책연대와 민주통합당 합류의 실험을 되풀이했지만 대선 패배와 조직혼란의 상처만 안게 됐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수많은 노조간부들이 민주연합전선에 가담했다. 진보정당이 파탄지경에 이른 마당에 급박한 현실 노동문제 해결과 노동운동 조건 개선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진보정치의 한계, 곧 짧은 역사와 엷은 역량의 산물이었다.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져 어디까지 추락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왔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삶을 접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선 패배에 대한 절망감보다 노동운동 전망에 대한 좌절감이 더 깊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선 과정에서 감동적인 TV 찬조연설을 했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는 ‘죽음의 번호표’를 든 노동자들의 상태에 대해 절절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경고했다. 많은 이들이 대선 전부터 집권여당이 나서 긴박한 노동현안을 풀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대선이 끝나자마자 ‘죽음의 번호표’는 여지없이 주어졌다. 이제는 대통령 당선자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지만 원인제공자인 이명박 정권은 물론이고 승리자의 일등공신인 보수언론들은 한마디 언급조차 없다.

이미 고인이 되신 이소선 어머니는 투쟁현장에 가면 이렇게 강조했다. “죽음은 전태일 하나로 족하다. 더 이상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라”고.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되뇌기도 면구스러운 일이지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경구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자신을 내던질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긴박함을 어찌 쉽사리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전태일 열사 죽음 이후 문제해결을 약속했던 지배권력이 겨우 1년여 만에 노동기본권을 박탈하고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했던 역사를 기억한다면, 경제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노동을 배제했던 민주화 정부하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았다면, 이제 ‘죽음의 번호표’는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재도약을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44@hotmai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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