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법 철폐’는 구호로서는 훌륭한 말이다. 우리는 이미 이 훌륭한 구호의 덕을 톡톡히 봤다. 19대 국회에 파견노동에 대한 규제법안이 여러 건 제출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호출·용역 같은 더 많은 간접고용을 규제하기 위한 입법화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제 투쟁구호와 입법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의 말이다. 최근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비정규직 주체형성과 전략적 선택’(매일노동뉴스펴냄·2만5천원)를 발표한 조 교수는 “생산현장에서 자본이 공세를 펼치고, 정규직 이기주의가 커지고, 노동계의 조직역량과 투쟁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변화된 조건에 맞춰 투쟁의 주체가 새로운 선택을 할 시점이 왔다”고 역설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니꼴라오홀에서 이 책에 대한 북토크가 진행됐다. 저자인 조 교수와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박성국 매일노동뉴스 대표가 대화를 나눴다.

박성국 : ‘비정규직 주체형성과 전략적 선택’이라는 책을 발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조돈문 : 나는 ‘계급’, 특히 노동계급에 대해 연구해 왔다.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0년도 더 됐고,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05~2006년께다. 그때부터 정리해온 보고서와 학술논문을 엮었다.

2006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특수고용직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는데, 특수고용직을 13개 직종으로 나눠 그 중 레미콘·덤프 같은 건설기계 부문을 연구했다. 그때 비정규직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 배웠다. 그러면서 비정규직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과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며 비정규직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가, 사실은 각론적으로만 접근해 온 게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들었다. 그런 고민을 이 책에 담았다.

박성국 : 요즘 출판시장을 보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책도 양분화 돼 있다. 비정규직 관련 법률실무서이거나, 비정규직의 실태를 다룬 르포 정도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보고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활동가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어보니 어떤가.

이남신 :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조 교수가 나한테 한 마디 묻지도 않고 2007년 이랜드·뉴코아 투쟁에 대해 평가한 대목이 있었다(이남신 소장은 이랜드일반노조 수석부위원장 출신이다). 그런데 ‘뉴코아는 패배, 이랜드는 부분성과’라며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투쟁사업장 동지들을 모아 조 교수 집 앞으로 항의집회를 가야하나 생각해봤다(웃음).

조 교수가 연구자로서 마지노선에 서서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자가 26개에 달하는 투쟁사례를 연구자 자신의 프레임에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면서 타협하지 않은 점을 존경한다. 투쟁 사례와 연구를 접목한 소중한 작업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박성국 : 이 책을 편집한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노동계급의 형성’인 것 같다. 노동자는 어떻게 계급을 형성하나.

조돈문 : ‘계급 형성’은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노동자들이 하나의 집합적 계급을 형성하는 것이다.

도토리묵으로 설명해 보겠다. 도토리묵은 도토리 가루로 쑨다. 이 가루를 입으로 후~ 불면 입자가 날아가 버린다. 이렇게 무한히 약한 입자 하나하나가 노동자다. 하지만 이 가루에 물을 붓고 열을 가하면 응고하기 시작한다. 계급 형성은 그런 것이다. 낱개의 무수한 입자가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지고, 힘을 갖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계급 형성의 과정이다.

박성국 : 그렇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계급 형성의 미스매치(mismatch)’는 무엇을 의미하나.

조돈문 : 계급 형성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조직적 형성'과 '이념적 형성'이다. 먼저 조직적 형성은 노동자가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 결속력을 갖는 것이다. 이념적 형성은 그렇게 모인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얼마나 발전돼 있느냐, 한 데 모인 노동자들이 어떠한 계급적 목표 지향하느냐 하는 문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들이 만들어지고,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은 노동계급의 형성을 진전시켰다. 정규직은 조직적 형성과 이념적 형성에서 비정규직을 압도하며 계급형성을 주도했다. 96~97년 노동법 개악저지투쟁(노개투) 총파업이 그 정점이다. 그 뒤 외환위기를 거쳤다.

경제위기가 지난 뒤에도 조직적 형성은 여전히 정규직이 앞섰다. 비정규직노조의 조직률은 3%를 넘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념적 형성에 있어 정규직은 더 이상 비정규직을 앞선다고 할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규직 내부의 인식 격차가 커지면서, 이념적 형성의 역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경제위기 전 일반 시민들은 노동조합의 투쟁이 승리하면 사회적 불평등이 약화된다고 인식했다. 그런데 경제위기 이후에는 노조가 투쟁에 승리하면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여기게 됐다.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이 전체 노동계급을 대변하기 보다는 특정 부문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 급급했다는 뜻이다. 민주노총의 정규직 노조들이 조직력 갖고 발언권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최소한 계급 내적으로는 도덕적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조직적 형성은 정규직이 앞서지만 이념적 형성은 비정규직이 앞서는 현상이 바로 계급형성의 미스매치다.

박성국 : 이 책은 노동계급의 형성은 미스매치의 극복을 통해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비정규직의 주체 형성과 정규직의 딜레마 극복을 강조했다.

조돈문 : ‘정규직 이기주의’가 화두가 될 때 캐리어와 지엠대우(현 한국지엠)의 사례를 연구했다. 두 사업장은 정규직이 비정규직 조직화에 나서고, 비정규직 문제를 끌어안고 투쟁을 전개한 모범적인 사업장이었다. 그런데 비정규직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어 투쟁을 전개하자 정규직 조합원들은 비정규직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면 앞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분석에 나섰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태도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까지 막연하게나마 내면화하고 있었던 계급적 정체성,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정규직의 요구조건이 실현되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정규직들의 고용을 지탱해온 ‘안전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눈을 뜬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지 않아야 정규직의 이해가 보호되는 상황에서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을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기업과 타협하게 된다. 비정규직 노조는 박살이 난다. 그 다음은?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기피한 정규직노조 역시 조직력이 약화됐다. 현장 장악력은 사측에 넘어갔다.

이 싸움의 승자는 회사측이었다. 법원의 불법파견 판정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사회적 압박을 받고 있던 회사측은 비정규직노조의 무력화와 정규직노조의 약화로 손쉽게 상황을 돌파했다. 연대하지 않으면 비정규직만 죽는 것이 아니다. 정규직도 죽는다.

박성국 : 이 책에는 스페인 사례가 등장한다. 스페인은 90년대부터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을 실행한 국가다. 시사점이 무엇인가.

조돈문 : 스페인은 유럽 선진자본주의 국가 중 비정규직 문제가 가장 심각한 국가다. 84년부터 이후 굉장히 많은 정책적 실험이 있었다. 스페인 사례를 연구한 결과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의 경우 한 번 완화했다가 강화하면 그 효과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래도 사용사유 제한보다 더 강한 효과를 갖는 정책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정규직 전환 지원정책이 효과를 갖는다는 점도 확인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풍선효과’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간제 규제를 강화하니 간접고용이 늘었다. 스페인에서도 파견과 용역이 혼합된 불법적인 고용관행이 증가했다. 이는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이같은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비정규직 권리입법을 주장할 때 각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권리입법을 도입할 때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박성국 : 이 책은 굉장히 논쟁적인 제안도 담고 있다. 파견법 철폐 주장을 유보하고, 간접고용 전반을 엄격하게 규제하자는 내용이다.

조돈문 :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민주노총의 주요 요구안은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과 파견노동 철폐다. 나는 이 같은 요구안이 잘못됐다고 본다. 대표적인 각론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전체 비정규직을 먼저 규제하고, 나쁜 비정규직을 강하게 규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모든 상시적 업무에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모든 비정규직에 대해 사용사유 규정을 신설해 비상시적 업무 가운데 특정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한시적·예외적으로 비정규직 사용을 허용해야 한다. 또 직접고용보다는 간접고용을 강하게 규제해야 한다. 간접고용에 대한 더 강한 규제 장치가 도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만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파견법 철폐’는 구호로서는 훌륭한 말이다. 우리는 이미 이 훌륭한 구호의 덕을 톡톡히 봤다. 19대 국회에 파견노동에 대한 규제법안이 여러 건 제출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용역·호출 같은 더 많은 간접고용을 규제하기 위한 입법화 논의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파견법 철폐 구호가 파견노동에 관심을 집중시킨 결과다.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결과를 분석하면 파견노동은 대단히 이질적이다. 대졸 전문직 직종과 하층 파견이다. 특전적인 대졸 전문직까지 보호하자고 민주노총이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현재 민주노총의 역량을 볼 때 파견법 폐지는 불가능하다. 민주노총이 모든 사회·경제적 요구를 포기하고 파견법 폐지 하나만 요구하면서 1년 내내 총파업을 벌여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총파업도 불가능하고. 따라서 투쟁구호와 입법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이남신 : 정확한 지적이다. 비정규직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 파견법 철폐는 금과옥조다. 이유 불문하고 어떻게 중간착취를 법으로 허용할 수 있느냐는 주장을 반복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정규 노동자의 노조조직률이 2%도 안 된다는 점이다. 98%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실태는 어떤가. 3대 간접고용이라고 하는 파견·용역·호출 중에서도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용역·호출 노동자의 처지가 어떻고 규모의 추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세밀하게 봐야 한다.

간접고용의 영역에서 파견은 협소하다. 이 책은 파견법을 폐지에 집중하고 있는 역량을 더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박성국 : 파견법 철폐를 유보하고 간접고용을 넓게 규제하자는 제안에 노동계의 공감대가 모아질까.

이남신 : 전혀 아니다. 민주노총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가 바로 파견법 폐지를 둘러싼 논란이다. 특히 파견 문제가 대선국면에서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고, 노동계의 전투력을 떠받치는 화두로 부상한 상황에서 파견법 폐지를 유보하자는 이 책의 주장이 공론화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어떤 의제든 일장일단이 있다. 파견법 철폐를 유보하자는 얘기도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 고리로 삼을 건지 객관적·과학적으로 규명해 보자는 말이다. 파견법 철폐에 반대한다는 말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로드맵을 공론화하자는 말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전혀 모르는 담론의 영역에서 헤매고 있다. 활동가들의 전략과 무게중심이 빠르게 이동해야 한다.

조돈문 : 그동안 비정규직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욕을 많이 먹었다. 크게 두 가지다. 한 쪽은 내가 너무 개량적인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파견법을 철폐해야지 파견을 허용하면서 규제를 강화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지적이다. 10년을 이어온 파견 철폐투쟁의 성과를 뭘로 보느냐는 비판도 들었다.

다른 한 쪽은 우리나라의 현실이 얼마나 어려운데 실현 불가능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규제 강화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상반된 비판 속에서 파견법 폐지보다는 모든 비정규직의 사용사유제한 도입과 간접고용 규제 강화라는 목소리는 묻히기 일쑤였다.

내가 민주노총에 이러한 전략적 선택을 강요하는 이유는 ‘비정규직을 기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파견법을 폐지시킬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생산현장에서 자본이 공세를 펼치고, 정규직의 이기주의는 커지고 있다. 민주노총의 조직역량과 투쟁동력도 떨어지고 있다. 상황은 이렇게 달라졌는데 민주노총의 요구안은 만날 똑같다. 기간제에 대한 고용기간 제한의 폐해로 풍선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구안을 수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이 문화재관리청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박성국 : 이 책은 변화된 조건에 맞춰 투쟁의 주체가 새로운 선택을 할 시점이 왔다고 역설하고 있다. 조 교수가 이 책을 통해 던진 문제의식이 노동계 안에서 생산적 논쟁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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