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자부품을 만드는 전북 군산의 A사는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는 회사로 지역에서 소문이 자자해 일감이 몰려도 신입직원을 뽑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전 직원이 98명인데, 지난해 월 평균 3명꼴로 이직하면서 기존 직원들의 장시간 노동 문제가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회사는 노사발전재단 근로시간줄이기 컨설팅을 받았다. 2주일 단위의 탄력적근로시간제를 도입해 연장근로시간을 주당 12시간 이하로 줄였다. 근무시간 중 10분씩 두세 번 자유롭게 쉬던 휴게시간을 무급으로 전환하고 대신 특별수당 형태로 임금을 보전했다.

충북 충주에 있는 LCD 디스플레이용 광학필름 제조업체 B사는 최근 생산부서의 교대제를 전면 개편했다. 2조2교대를 하는 34명의 생산직을 3조2교대로 전환하고 10명을 추가로 채용해 휴일근로를 아예 없앴다. 월 평균 67시간에 달했던 휴일근로가 사라지고 야간근로도 월 39시간에서 24시간으로 감소했다. 교대제 개편으로 휴일·야간근로 수당이 줄었지만 회사가 100% 보전하기로 하면서 임금은 삭감되지 않았다. 대신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11일 노동계에 따르면 장시간 노동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사업장별로 실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노동자는 임금삭감 없는 실노동시간 단축을, 사용자는 노동시간이 줄더라도 생산량에 타격을 받지 않고 추가 고용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는 형태의 노동시간단축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근무형태는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노동시간단축이 노동시장 문제를 바로잡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안고 있는 '적은 고용기회와 너무 많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지금의 노동시간단축 논의의 흐름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이와 관련해 노동계 내부에서는 '실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문을 열기 위해 '노동 유연화'의 문까지 열어 주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달 1일과 2일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서 민주노총과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이 공동주최한 '국제 비교를 통해 본 실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창출' 국제 심포지엄에서도 이런 문제가 주요하게 제기됐다.

노동시간 유연화로 산별교섭 약화된 독일

독일의 경우 90년대 이전까지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산별노조의 파업들이 이어졌다. 독일 금속노조에서 노동시간단축 협상을 주도하면 84년 38.5시간제, 90년 35시간제 노사합의를 이루면서 전 산업의 실노동시간 단축을 이끌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단체협상을 통한 노동시간단축은 잠정적으로 중단됐다. 2000년대부터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탓이다. 탄력적 근무시간 제도의 정산기간이 확대되고 생애노동시간 계좌제가 활용되면서 노동시간 줄이기보다는 유연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는 산별교섭 구심력 약화와도 관련이 깊다. 독일 금속 노사는 주 35시간제에 합의하면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주 40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예외조항을 넣었는데, 이를 활용하는 사업장들이 늘어난 것이다. 작업과 노동시간이 개별화되는 노동 유연화 제도는 산별교섭이 아닌 기업별 교섭의 의제로 다뤄진다. 토마스 하이페터 독일 뒤부르크-에센대 교수는 "2009년 조사 결과를 보면 금속 사업장에 단축근로제나 노동시간 계좌제를 활용하는 사업장이 5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노동시간 관련 내용이 산별협상에서 빠지고 사업장 단위 협상으로 이전되면서 산별노조는 노동시간 규정에 대한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라고 말했다.

파트타임 급증으로 평균노동시간 줄어든 일본의 비극

일본의 평균 노동시간 추이를 보면 90년대를 기점으로 급격하게 줄어든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연간 2천700시간에 가까웠던 평균 노동시간이 95년 2천500시간대로 줄더니 2010년에는 2천400시간을 밑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장시간 노동으로 유명한 일본에서 어떤 방식으로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일까.

비결은 시간제노동이었다. 시간제 노동자수는 평균 노동시간 그래프와 반대로 나타난다. 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시간제 노동자의 규모가 90년 30% 수준에서 2005년 40%대까지 수직상승 현상을 보이고 있다.

반면 전일제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80년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 '사회생활 기본조사'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일제 남성 노동자의 주당 노동시간은 81년 52.17시간에서 96년 51.94시간으로, 2006년 53.32시간으로 되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일제 여성 노동자도 사정은 비슷하다.

전일제 노동자의 경우 '서비스 잔업'이라고 불리는 무보수 초과노동 문제가 심각하다. 일본의 연간 노동시간 통계는 자료에 따라 350시간 가까운 차이가 나타난다. 일본 후생노동성에서 실시하는 기업체별 조사 형태인 '매월노동통계'를 보면 연간 1천754시간 일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1천800시간 밑도는 ‘노동시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가구별 조사(노동자 개인) 형태인 '노동력 조사' 통계에서는 2010년 기준 연 평균 노동시간은 2천106시간이다. 기업체에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는 노동시간과 노동자가 실제 일하는 노동시간 간 격차가 무려 350시간이 넘는 것이다.

고지 모리오카 간사이대 교수는 이 같은 차이에 대해 "일본의 정규 노동시간은 연간 1천634시간이지만 초과노동이 472시간에 이르고, 이 가운데 지불되지 않는 무보수 잔업이 352시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88년 2천100시간 수준의 연간 노동시간을 92년까지 1천800시간으로 낮추겠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92년 '노동시간 단축 임시조치법'을 제정했으나 역시 전일제 노동자의 노동시간단축에는 별다른 효과를 낳지 못했다. 2007년 일본 고용상태조사의 장시간 노동자 분포 추이를 보면 연 350일 이상, 주 6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3천21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20.9%에 달한다. 노동시간 단축을 임시조치법이 강제성이 없는 일종의 가이드라인 격이었기 때문에 실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은 노동기준법을 개정해 87년부터 주 40시간제를 도입했지만 우리나라 근로시간특례제도와 같이 노사합의로 초과근로를 무한 연장하는 길을 열어 두고 있다. 이로 인해 어떤 기업은 하루 15시간의 연장근로를 하는 곳도 있다. 장시간 노동은 일본에서 과로사 혹은 과로자살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일본에서는 과로사를 막기 위한 법 개정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데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가 핵심이다.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려면 법·제도 개선 뒷받침돼야”

일본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한국은 이미 평균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노동자 평균 노동시간이 감소하는 대신 시간제 노동자수가 급증하는 일본 방식이 우리나라에서도 전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근로형태 및 비임금근로조사'에 따르면 2002년 통계작성 이후 처음으로 시간제 노동자 비중이 10%를 넘어섰다. 시간제 노동자수는 올해 8월 182만명으로 1년 새 7.3% 증가했다. 시간제 노동자의 한 달 임금은 60만원이 겨우 넘는 수준이다. 지난 1년간 임금인상률도 전체 임금노동자가 3.5%(7만2천원) 오를 때 시간제노동자는 겨우 0.5%(3천원) 증가에 그쳤다.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한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실노동시간 단축 정책이 성공하려면 일자리 창출과 연계하는 법·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들은 “노동자의 건강한 삶, 일과 가정의 균형, 산업재해 감소, 성평등과 일자리 나누기를 위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정부 정책이 매우 중요하다”며 노동시간 관련법이 전체 노동자에게 적용되고 노동시간 상한과 휴일·휴가의 확대, 초과노동의 엄격한 제한과 휴식권의 보장 등이 담긴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담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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