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랜드 계산원 언니에게

우리가 처음 만날 날이 언제였을까요. 영등포의 어느 노조 사무실에서, 아니면 여의도공원 집회장에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모르는 사이로 스쳤겠지요. 하긴 그때 나는 당신을 알아볼 겨를이 없었잖아요. 스물여섯. 2004년의 여름이었네요. 매일노동뉴스의 문을 열었던 그때.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 정진학원 6층 가건물. 장막 같은 종이냄새, 담배냄새를 걷어 내고 비닐장판 깔린 좁은 복도를 따라 다섯 발짝 걸어 오른쪽 방. 어느 밤 구멍 뚫린 천정에서 새끼쥐 한 마리가 떨어져 날밤 지새우던 기자 한 명이 기절할 뻔했다던, 거기 말이에요.

출근 첫날. 무슨 기사였더라. 기사를 송고하고 두근두근 데스크의 처분만을 기다리는데 한 선배 제게 그러셨죠. “이렇게 쓰려면 기사 쓰지 마세요!”

입사하고 3년은 그 모양이었죠. 뭐가 뭔지 모르겠고, 무섭고, 숨고 싶고. “휴~ 오늘도 용케 버텨 냈구나” 했던. 잠을 청하면서 내일 아침이 안 왔으면 했던 나날들. 그렇게 터널의 끝자락을 헤매던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취재원 X. 당신을 만난 건.

2007년 여름. 어둠이 고개를 들던 시간. 코끝이 벌게져 울던 당신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어요. 저도 덩달아 많이 울었네요. 그날 당신이 힘들게 읽어 내려간 글을 찾아봤어요.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에서 떨리던 목소리가 되살아나네요.

“온종일을 서서 일하다 퉁퉁 부은 다리로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도 꽃보다 아름다운가.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오는 부품처럼 밀려드는 손님들을 향해 하루 수천 번도 더 웃어야 하는 그들도 꽃보다 아름다운가.”(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써서 보내온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 중에서)

맞아요.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 이랜드일반노조의 점거파업이 벌어졌던 현장. 우리가 처음 만난 곳.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이 시행된 첫해였어요. 당신은 ‘0개월 근로계약서’라는 해괴한 문서에 서명해야 했잖아요. 그런 걸 쓰면서도 그저 붙어 있기만을 바랐죠.

회사에 관용은 없었어요. 6개월짜리, 3개월짜리. 하물며 고용기간을 빈칸으로 둔 백지 근로계약서를 들이밀었잖아요. 그것도 용역 일자리. 2년 넘게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기간제법은, 이렇게 피하는 법이라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계약만료 순서대로 착착착. 700명 넘는 사람이 해고된 그 여름 당신은 정말 열심히 싸우셨어요. 7월20일. 그날의 아침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취재수첩을 쥔 손이 주책맞게 떨려서 글씨를 써 내려가기가 힘들었던 순간.

아침식사를 채 마치기 전이었다. 홈에버 월드컵몰 농성장에 주저앉아 몇 숟가락도 뜨지 못한 상황에서 경찰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매장 안으로 들어온 경찰들은 매장용 카트로 겹겹이 싸인 계산대 주변을 에워쌌다. 계산대 주변에 있던 이랜드 여성 조합원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침착하세요, 미리 가르쳐 준 지침대로 하시면 됩니다.” 김경욱 위원장은 식기도구를 치운 후 침착하게 조합원에게 말했다. 지도부와 조합원이 팔을 걸고, 구호를 외치면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그것도 잠시. 경찰들은 단체로 소리를 지르면서 진열대 위에 정리된 상품들을 무너뜨리며 계산대를 넘어왔다. 9시30분 투입된 경찰들은 이랜드 여성 조합원들을 차례차례 끌고 나갔다.”(매일노동뉴스 2007년 7월20일자 인터넷 속보 중에서)

끝을 알 수 없는 파업이 계속되던 어느 날. 퇴근길 장을 보러 동네마트에 들렀다가 누구를 만났는지 아세요? 세상에. 바로 당신이었어요.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무심코 넣어 둔 민주노총 토론회자료집을 보고는 “저도 민주노총 조합원인데…”라며 말을 거셨잖아요.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니 “이랜드 조합원이에요”라고 하셨고요. 생계투쟁 하러 왔노라고,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부끄러워하면서.

그날 정말로 부끄러운 건 저였어요. 기사를 쓰는 동안에는 정의의 사도인 양 가식을 떨었지만 그런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이 나이를 먹어서도 낯을 가리다니.

요즘도 지나는 길에 상암동에 들러 봅니다. 512일. 국내 최장기 파업으로 기록된 이랜드 사태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비정규직법 시행 이후 벌어진 첫 번째 집단적 노사갈등이었던 ‘아줌마 부대의 반란’이 당신의 삶에는 어떤 궤적을 새겼을지 궁금합니다.

파업 이후 노조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고 들었어요. 올해 8월에는 임금·단체협약도 체결했다고요. 교섭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해요. "과거 이랜드 사태로 징계해고된 후 신규로 입사한 조합원의 기존 근속경력을 복원한다." 어제는 오늘로, 또 내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승리의 환호는 언제나 저들의 몫인 시대, 스스로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한 당신.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2. 정리해고 노동자에게

당신은 2010년 겨울 전기 끊긴 공장의 멈춰 버린 컨베이어벨트 위에도 있습니다. 그날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보다 열렬하게 나부끼던 깃발은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품고 투쟁하고 있었지요.

이승에서 귀신보다 무서운 것은 먹고사는 문제다. 그러니 ‘해고 통지’는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자동차 에어컨에 들어가는 냉매압축기(컴프레서)를 제작하는 발레오공조코리아는 지난해 10월26일 전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다음날 퀵서비스를 이용해 직원들에게 ‘11월30일부로 근로관계가 해지된다’고 통보했다. 공장은 폐쇄됐다. 부동산과 기계설비, 각종 채무 등에 대한 청산절차가 시작됐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매일노동뉴스 2010년 2월9일자 ‘발레오공조코리아 … 공장폐쇄 날벼락, 그 후 100일’ 기사 중에서)

뒷날 김진숙 지도위원이 고공크레인에 올랐을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요. 죽지도 살지도 못해 떠도는 ‘중천’의 공간이 거기 있다고. 당신이 청춘을 바쳐 일궈 온 공장도 그랬어요. 이제 다시는 열리지 않을 그 공장.

기억나세요? 우리가 마주하고 식사를 했던 낭만의 식탁. 전기 끊긴 공장 안. 먼지를 뒤집어쓰기 시작한 기계들이 시꺼먼 어둠에 몸을 숨긴 속에서 우리는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었잖아요. 한 끼에 1천400원짜리 정찬을. 촛불을 밝혀 놓은 채.

87년 대한공조 시절부터 닦고 조이고 기름쳐 온 기계들은 이제 녹이 슨 고철이 돼 버렸을 거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프랑스 발레오사가 천안공장에서 완전히 손을 털고 철수하기로 결정했죠. 지난 1년 당신은 우울증을 앓으셨다고 들었어요. 천안공장에서 생산되던 자동차 부품들은 태국·중국공장에서 만들어지고, 공장을 잃은 당신은 비정규직이 되셨다고요. 며칠 전 짧은 통화에서 “세상이 온통 비정규직인데 저라고 별수 있나요”라 하셨잖아요.

어쩜 이렇게들 똑같을까요.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콜트·콜텍, 대우자판·파카한일유압·시그네틱스·대림자동차·K2…. 쌍용차에선 벌써 스물세 분이 돌아가셨어요. 죽음의 릴레이를 중계하는 일은 노동언론 기자에게 가장 큰 고역입니다.

노동언론 기자로 살아가겠다고 맘먹고 들어선 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취재원 X 당신을 만나고, 만나다 보니 생각나고, 생각이 고민이 되고, 그러다 마음이 아프고, 잘 쓰고 싶고, 써 놓고 보면 부끄럽고. 그렇게 8년4개월을 살아 보니까요. 주량만 늘었네요.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그 낭만의 식탁에서 소주 한 병 나눠 마실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러니 죽지 마세요.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3. 다이어트 중인 매노에게

스무 살 매노야. 너는 꿈이 뭐니. 이 언니는 말이야. 요즘 너를 보면 너무 걱정이 돼. 비쩍 마른 네 몸을 봐. 원고지 4매짜리 스트레이트만 먹고사니 자꾸 살이 빠지잖아. 가끔은 해설도 먹고, 분석도 먹고, 전망도 먹고, 와이드 인터뷰도 먹으렴. 살찌는 지름길인 현장스케치도 강추할게. 한 번만 먹어도 A4 네 페이지는 거뜬해. 어? 뭐라고? 먹고 싶어도 먹을 게 없다고? 하긴. 노동계가 좀 이상하긴 하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니까. 가령 이런 거.

“우리 내부 사정 잘 알잖아. 매노에 기사 나가면 현장에서 난리난단 말이야. 기사 꼭 써야겠어?”

“매노는 우리 편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줄 거지? 우리 노조에서 이번에 행사하거든. 한바닥으로 써 줘야 돼. 사진 크~게.”

“매노에 우리 광고 좀 공짜로 실어 주면 안 될까. 알잖아. 우리 예산 팍팍한 거.”

아…. 왜들 이러는 걸까요. 그래도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어. 너는 노동과 진보의 모든 것이니까. 진짜 화가 날 땐 이런 때지. 인간적으로도, 업무적으로도 좋은 관계라 생각했던 취재원이. 아 글쎄. 기자들의 로망인 ‘단독’ 소스를 홀랑 일간지에 줘 버리네. 아. 뒤통수.

아 맞아. 이런 부류도 있다. “매노는 어디 정파야?” 도대체 그게 왜 궁금할까요. 그렇게 묻는 저의가 뭘까요. 그런 저급한 잣대를 들이대다니. 아. 정말 기분 나빠.

빼빼 마른 매노야. 너는 이렇게 많이 퍼 주며 살아왔는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주지? 너의 두 팔로 살아가려고 때 되면 “광고 좀…” 때 되면 “책 좀…” 읍소하고 다니다 옐로페이퍼 취급을 당할 땐 마음에 생채기가 나겠지? 그래도 나는 너의 저력을 믿는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기록하는 너의 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이 기분 나쁜 사람이 있다면 미안. 나도 그동안 기분 많이 나빴거든. 여기서 퉁치자. 그럼 안녕.

2012년 10월의 어느 밤

소싯적 펜팔 좀 했다는 구은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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