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28살 K씨는 ○○자동차 입사 6년차 생산직 노동자였다. 그가 공장에 발을 디딘 86년, 공장은 군대 같았다. 정문을 통과할 때부터 경비가 장발을 단속했다. 어쩌다 불량이라도 나오면 조반장이 정강이를 차고 쥐어박았다.

87년 6월 항쟁의 불길이 피어오르자 ○○자동차 공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붉은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던 사이 "관청에 정식으로 노조설립 신고를 냈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이런 흐름은 전국을 휩쓸었다. 86년 2천675개였던 노조가 1년 새 4천103개로 불어났다. 92년에는 7천527개(노조조직률 14.6%)로 급증했다.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억눌러 왔던 권리를 달라고 외쳤다.

○○자동차노조는 처음으로 회사에 ‘성과 공정배분’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당시 ○○자동차에서 생산하는 자동차는 84만5천대. 국내 전체 생산량 172만9천대의 절반에 육박했다. 세계 7위의 자동차 생산국에 오른 만큼 노동자에게도 공정하게 분배해 달라는 요구였다. 같은해 12월 임금협약이 체결됐다. K씨의 기본급은 4만9천500원이 올랐고, 일시급 45만원과 통상임금의 146%을 더한 성과금을 받았다.

80년 이후 50% 초반 수준에 머물렀던 국민총생산에서 노동이 가져가는 몫을 의미하는 노동소득분배율은 87년부터 급격히 상승해 92년에는 57.9%까지 올랐다.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당시 K씨가 일하는 공장에서는 하루 걸러 하루꼴로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일하다 다치는 동료들을 보다 못한 노동자들이 작업라인을 세우고 안전한 작업환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92년에만 전국에서 10만7천435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다치거나 죽었다. 산업재해율은 1.5%나 됐다. 부끄러운 세계 1위였다. 반면에 그해 산재보험 총지출에서 산재예방에 쓴 돈은 4.8%(493억원)에 불과했다.
 

최저임금 925원, 내 집 마련은 언제쯤

K씨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친구들 중 절반 이상이 이미 가정을 꾸렸다. 통계청에 따르면 91~92년 남성평균 초혼나이는 27.9세다. K씨의 약혼녀 J씨는 공장 인근 마트에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다. 시간당 925원의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1천원에도 안 되는 돈이지만 그나마 전년과 비교해 12.8%나 오른 액수다.

K씨는 J씨와 힘을 합쳐 월수입의 절반 이상을 적금에 쏟아부을 작정이다. 도시가구 평균저축률(29.4%)을 훨씬 웃돈다. K씨는 결혼 후 4년 안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다. 근로자 연간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이 7.5배에 달한 만큼 K씨는 조금만 더 허리띠를 졸라맬 생각이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차를 모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결혼과 함께 며칠 앞으로 다가온 14대 대통령 선거도 K씨의 관심거리다.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선후보는 노동관계법의 현행 유지를 주장해 K씨의 눈 밖에 났다. 김대중 민주당 대선후보는 노동관계법을 국제노동기구(ILO) 수준으로 대폭 손질하고, 공무원의 단결권을 허용하겠다며 개혁성을 뽐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는 노조의 정치참여, 반값 아파트 공약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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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노동자, 산 자와 죽은 자·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찢기다

 
2012년 48세가 된 K씨는 비정규직이다. 97년 외환위기가 불어닥치는 바람에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났다. 회사는 97년 말 1천800명의 하청노동자를 퇴출시키더니 이듬해에는 정규직 가운데 3천여명의 여유인력을 정리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희망퇴직자 모집공고를 냈다. 노조가 "주당 38시간으로 근무시간을 단축하고 주간연속 2교대제로 근무형태를 변경해 일자리를 나누자"고 주장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98년 5월 총파업을 선언했다. 공장 정문 앞에 2만명이 모였다. K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선두에 섰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6월로 예정된 2차 총파업은 없던 일이 돼 버렸다.

K씨는 3차 희망퇴직 공고가 나자 사직서를 냈다. 12개월치 임금을 위로금으로 받았다. 회사는 정리해고까지 실시했다. '노란 봉투'를 받아든 동료들은 노조에서 선물로 준 주방세트(식칼)를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분을 삭이지 못했다. 정리해고의 망령은 2012년 현재 쌍용자동차에서, 한진중공업에서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 가고 있다.

고깃집, 치킨집 사장 '돌고돌아 비정규직'

98년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정부 실업자 통계로도 161만4천명에 달했다. 95년(43만명)의 3배가 넘었다. K씨는 퇴직금으로 고깃집을 차렸다. 망했다. 창업자금이 덜 드는 치킨집을 차려 아침부터 닭을 튀기고 밤새도록 배달을 했다. 또 망했다. 자영업자수는 2002년 798만8천명에서 지난해 684만7천명으로 100만명 넘게 줄었다.

K씨는 장사를 접고 공장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면접을 보러 갔다. 회사에서는 나이와 공장에서 일한 적 있냐고 묻더니 바로 일하자고 했다. 다음날 출근했더니 봉고차에 타라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자동차부품 공장 앞에서 내렸다. K씨는 번듯한 대기업의 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그에게 월급을 주는 회사는 휴먼○○이다. 비정규직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위기의 노동, 위기의 노동운동

면접 때 만난 하청업체 사장은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자동차 브레이크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었다. 1년이 지난 후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공장에서 일했다. 일하는 공장도, 만드는 제품도 달랐다. 그런데 임금은 같았다. 2011년 한 달에 토요일만 쉬고 하루 10시간씩 잔업과 특근을 했다. 1천766만원(제조업 비정규직 평균임금)을 벌었다. 제조업 평균임금(3천281만원)의 절반을 겨우 넘는 수준이다.

파트타임으로 동네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48세 여성 노동자 J씨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J씨는 1주일에 20시간 일하고 월급으로 60만원을 받았다. 1년4개월째 일하고 있지만 퇴직금도 없다. 잔업을 밥 먹듯이 하는데도 시간외근무수당을 주지 않았다. 억울해도 따질 곳이 없다. J씨 같은 시간제 노동자는 2011년 8월 170만2천명에서 2012년 8월 182만6천명으로 12만5천명 증가했다. 2011년은 한 해를 통틀어 파업건수가 65건이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가장 적었다. 근로손실일수는 42만9천일로 외환위기 이후 가장 짧았다. 노조 조직률은 2010년 9.8%까지 추락했다가 복수노조가 시행되면서 10.1%로 두 자릿수에 턱걸이했다.

김미영 기자

 


20년, 1%만 행복했다

소득불평등은 앞으로, 노동운동은 뒤로 '질주'


<매일노동뉴스>가 세상에 나온 92년은 올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격변기의 해였다.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졌고, 물가도 크게 뛰었다. 92년 1인당 국민총소득은 7천달러. 국내총생산(GDP) 기준 경제성장률은 5.8%였다. 87년(12.3%)의 절반에 그쳤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6.2%. 서울 버스요금은 250원이었다. 짜장면은 2천400원, 삼겹살 한 근은 3천800원이었다.

노동자들은 소처럼 일했다. 법정 노동시간이 89년 주당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줄었다. 하지만 92년에도 제조업 노동자들은 1주일에 50시간 가까이 일했다. 노동부의 통계(사업체노동력조사 10인 이상 사업장 기준)에 따르면 제조업 노동시간은 주당 48.7시간이었고, 이 중 초과근로가 7.4시간이었다.

92년 노동운동은 활력이 넘쳤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90년 노조조직률이 17.2%를 기록하면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후 노조조직률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92년에는 노조 7천527개, 조합원 173만5천명으로 집계됐다. 조직률은 14.6%에 머물렀다.

노조의 성장은 분배에 대한 사회적 욕구로 이어졌다. 국민총소득에서 노동이 가져가는 비중인 노동소득분배율 추이를 보면 80년 50.1%에서 87년 52.1%로 게걸음을 걷다 92년 57.9%, 96년 62.6%까지 치솟았다. 그래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70%보다 낮았다.

노동시장·노사관계 뒤흔든 외환위기

노동소득분배율 개선조짐은 90년대 중반을 끝으로 아예 사라졌다. 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분배의 정의'는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경제학)가 최근 발표해 주목을 끌었던 논문 '한국의 소득불평등, 1963~2010: 근로소득을 중심으로'를 보자. 우리나라 고소득층(근로소득 상위 20%)의 1인당 연평균 근로소득은 96년 이후 41.3% 증가해 2010년 6천856만원을 기록했다. 범위를 좁혀 최상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증가 폭은 훨씬 커진다. 지난 14년간 상위 10%의 근로소득 증가율은 53.8%, 상위 1%는 77%, 상위 0.1%는 155% 상승했다. 상위 0.1%에 해당하는 1만6천971명의 2010년 기준 1인당 연평균 소득은 무려 5억4천435만원이나 된다. 이에 반해 하위 20%의 근로소득은 24%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전체 노동자 1인당 연평균 실질 근로소득이 15% 증가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부가 최상위층으로 집중됐다고 볼 수 있다.

저임금 비중 세계 최고 … 원인은 임금불평등

"소득불평등도가 80년대 말 완화됐다가 90년대 중반 이후 악화되는 시기는 87년 노동운동이 활성화된 시점과 97년 외환위기 시점과 각각 일치한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연구원이 주최한 ‘새로운 사회경제 패러다임, 새로운 사회정책’ 국제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 연구위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선진 외국에 비해 개인의 근로소득은 매우 불평등한 구조를 가지는데, 가구소득은 상대적으로 평등한 축에 속한다. 저소득층일수록 가족구성원 모두가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은 것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저소득계층(소득 하위 20%)은 가구당 평균 1.4명이 근로활동에 참여한다. 반면 주요 선진국들은 0.3~0.7명 수준이다. 불평등한 노동시장을 온 가족이 돈벌이에 나서는 것으로 해결해 왔다는 뜻이다.

양극화는 저임금 노동자 확대를 초래했다. 전체 노동자 중 임금이 중위임금의 3분의 2에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 비중은 90년 21.3%에서 2010년 25.9%로 늘었다.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저임금 노동자 비중이 고령자를 중심으로 늘고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우려를 낳는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 3명 가운데 1명은 저임금 노동자다. 특히 생산직 베이비부머의 경우 10명 중 9명이 “은퇴 이후에도 계속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노후소득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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