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경찰서 종합민원실에서는 매일 밤 진풍경이 펼쳐진다. 적게는 20여명에서 많게는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원실 앞 천막에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대부분 대기업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들이다. 중간중간 노조 관계자들이 섞여 있다. 집회신고를 하기 위해 선착순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 따라 옥외집회나 시위를 주최하려면 최대 720시간, 약 30일 전부터 관할 경찰서장에게 집회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대기업이 밀집한 서울 서초구의 경우 기업이 용역업체 직원 여러 명을 고용해 집회신고를 맡기는 일이 다반사다. 노조나 시민·사회단체의 집회신고를 막기 위해서다.

2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김현 민주통합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2010년 이후 대기업체 앞 주요 집회신고 및 개최현황’ 자료에 따르면 KT·현대차·SK·LG·삼성(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생명) 같은 대기업들이 본사 사옥 앞에 1년 내내 집회신고를 내고, 정작 집회를 개최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표 참조>

특히 SK 종로 본사 앞의 경우 2010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946건의 집회신고가 이뤄졌는데, 실제 집회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생명 등 삼성타운 근처에서는 총 2천702건의 집회신고가 접수됐지만 실제 집회는 5건(0.19%)에 그쳤다.

현대차 양재동 사옥(1.75%)과 LG 영등포 본사(4.45%) 앞 집회 개최율도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않았다. 현대차의 경우 집회신고를 선점한 뒤 신입직원들을 본사 앞 인도에 일렬로 세워 놓고 질서유지 캠페인을 벌이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기업들이 노동자들의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유령집회를 신고한 셈이다.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비없세) 집행위원은 “주요 기업 관할경찰서에 가면 기업들이 고용한 용역직원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 달치 집회신고를 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해당 기업의 노동자들은 집회 한 번 하려고 40~50일을 기다려도 될까 말까 한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는 지난 23일 삼성일반노조가 서울 서초경찰서장을 상대로 "옥외집회금지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낸 집행정지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집회가 허용된다고 해서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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