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

역시나 봄은 아름다웠다. 더디게 거두어지는 겨울 끝자락에 봄은 어물쩍 뛰어넘는가 싶었는데, 푸른 물을 길어 올린 싱싱한 나무는 눈부신 꽃망울을 터트렸다. 한적한 시골마을을 지나며 보는 이 없어 아깝기만 한 벚꽃과 산수유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들은 건. 스물두 번째 죽음이라는 앵커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떨렸다. 하늘은 너무 맑았고, 벚꽃 잎은 난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 말이다. 22번이라는 참담한 번호표를 달고 세상 밖으로 몸을 내던진 사람의 고통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아 가슴이 아팠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봄을 기다렸을 그의 봄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 봄은 끝났다.

정말 이런 엔딩은 생각하지 못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공장에서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하던 이들의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보면서 싸워 이기길 바랐다. 높은 지붕 위에서 토끼몰이를 하듯 달려드는 경찰들의 방망이에 맞아 쓰러지고 끌려가는 이들을 보면서 그래도 버텨 이기길 바랐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이 투사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제 국민을 몽둥이로 때려잡은 경찰을 친히 격려하신 이처럼, 나도 그들이 못돼 먹은 세상을 혼내 주는 무서운 세력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끝까지 싸워서(경찰에 대한 격려가 무색하게 보란 듯이) 제멋대로 자르고 솎아 내는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며 당당하게 복직하길 기대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투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동료와 자동차를 만들고, 퇴근하면 때때로 동료와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얘기를 하고,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과일 한 봉지 사 들고 가서 TV 앞에 앉아 하루의 노곤함을 풀던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누군가의 형제였다. 그래서 일자리를 빼앗기면 그 소박한 삶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던 작은 사람이었다.

지난해 여름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가던 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책 작가모임’에서는 해고노동자 가족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 주는 행사를 했다. 작가들은 책에 일일이 아이들 이름을 적고 “엄마와 함께 읽어요.”, “씩씩하게 자라세요!” 같은 글귀를 썼다. 그중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 가족에게 보내는 책도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을 받는 아이 중에는 엄마를 잃고, 아빠를 잃어 할머니 집에 혹은 친척집에 맡겨진 아이들이 있었다. 작가들은 그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써 줘야 할지 막막해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희망도, 행복도 빼앗긴 아이들에게 책 한 권이 뭘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무릎에 앉혀 속살속살 책을 읽어 줄 엄마가 없고, 책을 읽고 조잘조잘 떠들어도 들어 줄 아빠가 없는 아이들한테 우리의 위로는 얼마나 무책임하고 가벼운가.

그제야 깨달았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싸움은 힘줄 불거지는 주먹이 아니라 눈물이었으며, 거친 고함이 아니라 간절한 외침이었다. 가족과 삶을 지키고자 했던 작은 사람들의 몸부림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끝내 그들의 눈물을, 외침을 외면했다. 정말 우리 사회는 정리해고가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아니라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다는 걸 몰랐을까. 정말 우리 사회는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비극을 몰랐을까. 정말 우리는 스물두 명의 희생자 앞에서 떳떳하게 명복을 빌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끔찍한 사회적 타살에 눈감아 주는 공범일지 모른다. 정리해고도 비정규직도 불가피하다고 떠드는 뻔뻔한 기업과 기업의 등에 업혀 국격을 높이겠다고 떠드는 비겁한 정부가 있는 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같은 비극은 재현될 것이다.

오는 18일 22번째 희생자의 49재가 치러진다. 19일에는 범국민대회가 열린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고인에게 고개 숙여 다시는 고인과 같은 고통을 짊어지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무자비한 정리해고는 없애야 한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부당한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스물두 명의 고인이 이승에 묶인 속박을 훌훌 털어버리고, 훨훨 떠나시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비로소 찬란한 봄을 함께 맞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