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대기업에는 혈통주의가 거의 없다. ‘장자권’이 득세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고, 2·3세의 경영권 세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스탠더드 오일의 록펠러 가문, 포드 자동차의 포드 3세, 휴렛패커드(HP)의 패커드 일가가 대주주로서 최고경영자(CEO) 선임에 가끔 개입할 뿐, 경영은 철저히 전문경영인의 몫이다. 최근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이 장남 라클란을 뉴스 코퍼레이션 관리담당 부책임자에 임명한 것이 뉴스가 될 정도다.

디지털 혁명으로 세대교체가 빨라진 미국의 신임 CEO들은 예외없이 전문경영인들이다. 시가 총액 기준 세계 최대 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제프리 이멜트, AT&T의 데이비드 도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스티브 발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CEO 지명자인 케네스 체놀트 등은 한결같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기업의 진화를 추구해온 기술경영자들이다.

이들의 정통성은 무엇보다 실적으로 뒷받침된다. 좋은 실적을 내지 못한 사람은 사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고, 외부 투자가들을 상대로 기업 가치를 방어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GE의 잭 웰치, 소니의 오가 노리오, 인텔의 앤디 그로브가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가장 먼저 들이댄 잣대도 실적이었다.

또 이들은 대주주를 벤치에 묶어둘 만큼 탁월한 전략적 사고로 무장하고 있다. 급변하는 메가 트렌드에 맞춰 사업과 조직을 재편하는 능력과 새로운 비교우위를 향해 창조적 파괴를 리드하는 기업가 정신은 기본이다. ‘기존의 규칙 파괴가 일류의 조건’(이데이 소니 사장)이라는 지적처럼, 실패를 겁내지 않는 모험가들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삼성경제연구소의 한창수 수석연구원은 “서구 기업들은 종신형 오너 혈통주의가 경영상의 리스크라고 보는 반면, 우리는 검증된 전문경영인 부족으로 경영권 세습을 수용하는 상황”이라며 “그 대안은 실력있는 CEO의 양성”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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