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석장의 카드가 있습니다. 가운데 카드는 스페이드Q 카드군요. 자 그럼 앞에 계신 분이 가운데 카드를 뽑아서 관객들에게 보여주세요.”
관객들의 눈앞에 나타난 카드는 당연히 스페이드Q가 아니다. 카드는 하트에이스로 바뀌어 있었다.

“어라?”, “우와~”
관객들의 눈이 커진다. 예상했던 결과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이번엔 로프 마술. 마술사가 로프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 한다. 빠른 손놀림으로 겹겹이 매듭을 묶더니 한순간에 쫙 풀어낸다. 마술사의 빠른 손놀림에 관객들이 눈을 떼지 못한다. 마술사가 말한다.
“모든 일이 이렇게 잘 풀릴 겁니다. 힘을 내세요.”

24일 저녁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한 유원지. 77일간 진행된 쌍용자동차 파업농성에 참여했던 노동자와 가족, 심리상담 전문가·웃음치료사·의료단체 관계자·노동계 관계자 등 5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은 ‘쌍용자동차 파업노동자 심리적 지지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 졸업식이 있는 날이다.
 
노동계를 비롯한 각계가 힘을 모아 장기 파업 후유증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집단 치유프로그램을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의료시민단체 일부가 장기투쟁사업장을 직접 찾아가 심리상담이나 의료지원 활동을 벌인 적은 있지만, 이들이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해 단계적으로 지원활동을 벌인 적은 없다.

이번 프로그램은 9주 과정으로 진행됐다. 1·2주는 웃음치료, 3·4주는 스트레스 이완 프로그램, 5~8주는 집단상담, 9주는 마술치료로 구성됐다. 프로그램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노동계과 특별한 인연이 없어 보이는 심리치료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의사와 한의사를 비롯해, 개그콘테스트 입상자와 프로 마술사까지 기꺼이 동참했다. 이들은 차비 정도의 비용만 받고 이번 프로그램에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장주 금속노조 문화국장은 “금속노조에 한의원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원할 때 진료와 상담을 받게 하자는 제안이 나올 정도로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줬다”며 “전문가 네트워크가 확대돼 다양한 프로그램이 도입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단번에 무너진 삶, 불면증 때문에 밤이 무서워"

마술 강의가 끝나자 9주간의 프로그램을 마치는 졸업식이 진행됐다. 총 22명이 프로그램을 수료했다. 쌍용차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 규모를 감안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지금 당장 심리상담이 필요한 노동자는 아직까지 이곳을 찾지 않고 있다. 파업이 종료된 지 100여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개 집 밖 외출을 꺼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업이 끝난 뒤 경찰의 전화 공세에 시달린 이들은 아예 가정용 전화기와 휴대전화를 꺼놓기도 한다.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금속노조나 쌍용차지부 관계자들도 파업참가 노동자들이 현재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졸업생을 대표해 김아무개씨가 인사말에 나섰다. 그는 “해고 결정으로 단번에 개인의 삶이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됐다”며 “아직도 밤이 되면 귓가를 때리는 환청 때문에 잠을 자기가 어렵다”고 털어 놨다. 말을 마치기도 전 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는 “세월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는데 해고·연행·구속·손배가압류 같은 낯선 낱말들 앞에 서니 힘이 든다”고 말했다. 김씨가 울먹이자 참석자들도 따라서 울기 시작한다.

“집 밖으로 나오기, 치유의 시작”

졸업식이 끝나고 뒷풀이가 이어졌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가자 ‘재취업’이 대화 주제로 떠올랐다. 한 노동자는 “100번 넘게 이력서를 썼는데 면접 오라는 회사가 없었다”며 “평택지역 사용자들이 쌍용차 출신을 뽑지 않기로 했다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평택시를 ‘고용개발촉진지역’으로 지정하면 뭐하냐?”며 답답해 했다. 파업 후유증에 재취업 스트레스까지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무급휴직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고용관계는 유지되지만 급여는 나오지 않는다. 이아무개씨는 “나이가 많아서인지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얻기도 어렵더라”며 “같이 일하던 동료들 얼굴이라도 보려고 이번 프로그램이 동참했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 참여 단체들이 공동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파업참가 노동자들의 심리건강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10명 중 4명에게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고도우울증이 발견됐다. 파업이 끝난 뒤 2명의 노동자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서치경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은 “집안에 고립돼 있는 노동자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이번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더 큰 상처를 받거나 극단적 상황에 내몰리기 전에 누군가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심리상태가 상대적으로 덜 불안정한 분들이지만, 이들도 걸핏하면 눈물을 내비친다”며 “여럿이 모여 있으면 왁자지껄한 듯 보여도, 속으로는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 이들의 현재 상태”라고 설명했다.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한 분들을 집 밖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이서치경(36·사진)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의 말이다. 이 국장은 쌍용차 파업참가 노동자 심리치유 프로그램에 기획자로 동참했다. 그는 “현재 힘겹게 투쟁 중인 노동자를 찾아가 심리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장기 파업 노동자를 대상으로 첫 심리치유 프로그램이 시도됐다.
“그 동안 노동운동진영은 신체적 건강 문제에 집중해 왔다. 그러다 2000년대 후반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자가 늘어나 정신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조합원이 투쟁의 주체일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상처받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데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로그램에 금속노조가 예산을 집중 투여한 것은 의미 있다”


- 이번 프로그램의 성과는 무엇인가.
“쌍용차 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거의 매일 밤 술의 힘을 빌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동자 가운데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된 분이 여럿이다. 스트레스 이완 프로그램 등 전문강사들의 교육이 효과를 본 것이다. 다양한 전문가그룹이 네트워크를 형성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노동계는 이들의 힘을 잘 모아 활용해야 한다. 이번 프로그램이 노동자 정신건강 진단을 위한 상시기구 설립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 어려웠던 점이나 아쉬운 점은.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한 분들이 많은데, 그들과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특히 평택지역의 경우 노동자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이 받은 심리적 압박이 상당하다. 이들을 집 밖으로 유인해내야 한다. 또 투쟁이 끝난 뒤 사후약방문식으로 프로그램을 가동할 게 아니라, 현재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찾아가 그들이 안고 있는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해소해 주는 방식이 더욱 효율적일 것 같다. 투쟁 중인 노동자들이 에너지를 소진하기 전에 그들에게 양분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구은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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